石荷公의 墓는 慶南 密陽市 初同面 斗岩里에 있습니다
안종덕 (安鍾悳, 1841~1907)
안종덕 (安鍾悳) : 1841년(헌종 7)~1907년(순종 원년)
자는 태로(兌老). 호는 석하(石荷). 휘는 종덕(鍾悳). 본관은 광주(廣州). 냉와(冷窩) 안경점(安景漸)의 종현손(從玄孫)이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으로 학문은 밀주(密州=밀양)에서 조선 500년 동안 점필재 뒤로는 처음이라는 세평이 있었다. 1842년(헌조 8) 진사시험에 올라 선혜랑(宣惠郞)을 거쳐 7군의 외직을 역임하였는데 임지마다 치적(治績)이 높았다. 1844년(헌종 10)에 나라의 정세가 크게 문란함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대책을 개진하니 세상사람들이 모두 충첨의우(忠瞻義旴)에서 우러난 글이라 하였다. 같은 해 10월 전라도 순찰사로 특명을 받아 탐관오리를 적발하여 법으로 다스려 민폐를 근절하고 관기를 확립함으로써 세도를 징청(澄淸)할 뜻을 밝혔다. 그 뒤 사원(祠垣)을 관장하게 되어 조정 사명(辭命)의 문안은 모두 선생이 손수 쓴 것이 많았다. 만년에 지위와 덕망이 같이 높았는데 좌천으로 청송군수로 도임하여 별세하니 세상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선생은 밀주 근대의 학문과 명환으로서 큰 별이었다. 문집 7권을 남겼는데 행장(行狀)은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이 찬하고 갈명(碣銘)은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찬하였다.
출처 : 밀양시청/밀양의 인물
[문집해제] 안종덕 (安鍾悳), 석하집 (石荷集),1928
『석하집』은 조선 말기의 문신 안종덕(安鍾悳 ; 1841∼1907)의 시문집이다. 안종덕의 자는 태로(兌老), 호는 석하(石荷),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이 책은 1928년 손자 병규(秉奎)가 편집, 간행하였다. 1903년(광무 7)에 올린 소(疏)는 적신(賊臣)들이 백동화(白銅貨)를 남주(濫鑄)하여 그 폐단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자 이의 시정책을 건의한 것으로 경제사 연구의 참고자료로 평가된다. 1904년에 올린 소는 한일협약의정서(韓日協約議定書) 체결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이에 조인한 이지용(李址鎔) 등에게 중벌을 내릴 것을 주장하였다. 서(書) 중 1884년 민태호(閔台鎬)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 조정에서 논의되고 있던 복제개혁을 극력 반대하는 내용이다. 잡저에는 양산·울산·청송 세 고을 백성들에게 효유(曉諭)한 약속문(約束文)이 있다. 또, 그 중 「향교교폐절목(鄕校矯弊節目)」은 양산향교의 폐단을 바로잡은 절목인데 모두 10조목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중추원건의(中樞院建議)」·「중추원상정부첩(中樞院上政府帖)」 등이 있다. 이 문집은 근세사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종덕의 아버지는 문원(聞遠)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양로(良魯)의 딸이다. 정원(貞遠)에게 입양되었으며,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1882년(고종 19) 진사가 되었고, 같은 해 어사(御史) 이도재(李道宰)의 천거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비서원승(?書院丞)·영덕현감(盈德縣監)·청송군수겸선유사(靑松郡守兼宣諭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 책은 1928년 손자 병규(秉奎)가 편집, 간행하였다. 1903년(광무 7)에 올린 소(疏)는 적신(賊臣)들이 백동화(白銅貨)를 남주(濫鑄)하여 그 폐단이 극심한 지경에 이르자 이의 시정책을 건의한 것으로 경제사 연구의 참고자료로 평가된다. 1904년에 올린 소는 한일협약의정서(韓日協約議定書) 체결을 반대하는 내용으로 이에 조인한 이지용(李址鎔) 등에게 중벌을 내릴 것을 주장하였다. 서(書) 중 1884년 민태호(閔台鎬)에게 보낸 편지는 당시 조정에서 논의되고 있던 복제개혁을 극력 반대하는 내용이다. 잡저에는 양산·울산·청송 세 고을 백성들에게 효유(曉諭)한 약속문(約束文)이 있다. 또, 그 중 「향교교폐절목(鄕校矯弊節目)」은 양산향교의 폐단을 바로잡은 절목인데 모두 10조목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중추원건의(中樞院建議)」·「중추원상정부첩(中樞院上政府帖)」 등이 있다. 이 문집은 근세사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안종덕의 아버지는 문원(聞遠)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양로(良魯)의 딸이다. 정원(貞遠)에게 입양되었으며,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1882년(고종 19) 진사가 되었고, 같은 해 어사(御史) 이도재(李道宰)의 천거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비서원승(?書院丞)·영덕현감(盈德縣監)·청송군수겸선유사(靑松郡守兼宣諭使) 등을 역임하였다.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석하집은 국학진흥원과 국립중앙도서관(고서원문 DB) 에서 열람 가능하다.
중랑장공후 사맹공파 (밀양 성만)
國柱 - 崗 - 叔良 - 普文 -- 覯 -- 峋 - 應雲 - 餘慶 -- 璹 -- 翔漢 -- 時泰 --- 欽 -- 信亨 -- 景晉 -- 珩重 -- 孝庠 -- 貞遠 -- 鍾悳[系子]
출생상으로는 경진(景晉)공의 동생 경우(景愚)공의 현손이다.
景愚 -- 瑩重 -- 孝準 -- 聞遠 -- 鍾悳[출계]肯洙--秉奎-景煥-在武 -禹淸-相俊
-基鉉
-元鉉
-在敦 -烘熱
--秉均-奭煥-在有-度鉉
-泳煥-泰規-鎭鉉
-在夏
-在赫-周鉉
--秉鎬-佑煥-在雄-仲鉉
-星昊
-賢建
-在昇
-鐸煥-政浩
냉와(휘 景漸)공은 경진(景晉)공의 백형(伯兄)이다.
안신형(安信亨, 1692-1760) - 안경점(安景漸, 1722-1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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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1855-1931) 찬 행장(行狀)
小訥先生文集卷之四十五 行狀
公諱鍾悳初諱彦澤字兌老號石荷安氏廣州人系出高麗大將軍諱邦傑之後中郞將諱國柱麗亡守罔僕節生諱岡生員我太宗徵察訪不就三傳而有諱覯司諫號苔巒佔畢齋金先生門人又三傳而
:: 0008 ::
有諱餘慶生員號玉川享冠山別祠諱璹正郞號樂園受業于寒岡先生諱翔漢宣敎郞號東巒丙子倡義是爲公十世九世八世祖也東巒之曾孫曰信亨生五子第二諱景晉第三諱景愚諱景晉生諱珩重是爲公曾王考也祖諱孝庠禰諱貞遠妣交河盧氏光健女檜山黃氏泳女諱景愚生諱瑩重是爲公本生曾王考也祖諱孝準考諱聞遠號溪广有志行妣眞城李氏師淳女退溪先生後驪興閔氏良魯女友于亭九淵後也憲廟辛丑十月九日公生于府東金谷僑第閔氏出也六歲能集字爲詩七歲犯痘臥
:: 0009 ::
聞伯氏誦賈誼疏證之曰某字漏某句闕家貧無以習寫見片紙輒書未幾頗得妙十餘歲詞藻敷發人爭傳誦十四赴慶州公都會題出便下筆詞翰俱贍敏觀者口呿讀書不務遍數及對人討論不遺小註而說其歸趣弱冠聲稱已藉菀庚申丁本生父憂壬戌丁本生母憂制闋聞性齋許先生倡學于金州往拜焉時設白場中壯元明日行鄕飮酒禮選爲讀約自是往來質疑論畢齋先生門人錄遊京城卿士大夫倒屣迎之嘗遊海西歸渡碧瀾津有詩曰一年黃海客斜日碧瀾津舟過中流急回思未渡人人許其
:: 0010 ::
濟物之志壬午二月應製中進士御史李道宰薦于朝八月除繕工監假監役領揆洪淳穆以前監役金炳昌田愚柳道性李象弼兪鎭泰及公啓請調用付龍驤衛副司果十月應進士榜時上憂民國經費艱絀命諸大臣會戶惠堂自御用膳服宮掖員數至京外宂官吏隷濫額宂費商確而裁減之充公爲減省廳會員尋改稱會員爲令考閱文簿十一月命八道四都守臣薦孝廉才諝各一人試於太學慶尙則監司尹滋承以公薦上試李應辰問時事公以策對凡屢千言擢第一曰經國手也許令常赴
:: 0011 ::
會試十二月減省文簿畢癸未正月差宣惠廳湖西郞廳兼管諸道四月夫人訃至請由還鄕五月行葬禮因大臣筵奏命該守令促令赴職甲申三月陞通訓時有本廳貢案釐正之命懲倉卒奸蠹矯船軍痼瘼堂上閔台鎬雖總管而公實贊畫焉廳隷挾掖勢病船卒諸僚不能禁公慨然曰沮於下而法不行朝廷之恥也將朝暮斥退廳隷知其不能回乘夜進曰自內有密旨請具帽帶公正色曰內旨豈汝輩所傳者哉明當有處置隷自伏乞哀翌日乃斥去五日有衣製變更之令公與閔公台鎬書曰國勢
:: 0012 ::
之弱兵制之弛豈可諉於衣服之罪乎今日急務非無加於此者何汲汲焉遽變先王之遺制自歸變於夷之科乎十月金玉均作亂上移御下都監各殿移御覺心寺閔公已被害惠廳堂上闕上命公攝行有召命促輸稅米五百斛以供各殿粮料公奉命蒼黃搜私庫米七十石輸進于覺心寺乘夜步出江口適湖南稅船上來卽輸入四百斛于行在上面諭曰夜寒江險得無勞乎尋還御景福宮陪從焉乙酉二月伯氏中生員請由還鄕六月仕滿遞職八月除義禁府都事尋遷掌樂院主簿十
:: 0013 ::
月遷親軍左營文案丙戌正月出爲聞慶縣監地僻弊劇稱難治公曰不敎而罪之罔民也作文揭示坊曲興學校務農桑勸孝友懲淫詖凡十餘條未期年績成十二月移守盈德縣聞慶民立去思碑治盈一如聞慶戊子歲大荒捐俸賑民申省得貨五百貫米五百石以救之歌誦盈途己丑正月移守梁山郡革校弊正鄕俗節目以勸懲之辛卯正月移大興郡懲土豪輩奪人庄土者而覓還之隣郡有積年疑獄公爲査官徒行閭里而得其情罪元犯者釋被誣之囚人稱神明十月移興海郡捐俸資講學入校宮行鄕
:: 0014 ::
飮酒禮繡衣金思轍啓曰興海郡守安某莅未幾朔民誦來暮忠淸御史李重夏啓曰大興前郡守安某文識贍敏吏才通鍊躬執亂簿錙銖無遺裁決滯務繩墨不差察隱瘼而刷宿逋遽然移符民皆攀轅而號甲午九月除蔚山府使歲値六歉捐俸設賑流民還集丁酉四月以眞殿營建所別監董被召入京九月陞正三品敍中樞院議官八月上疏請肅淸宮禁疏略曰近日所謂別入侍非古制伺候左右以私覿爲榮者皆小人也以密告爲忠者皆奸謀也此輩競進爭恩妬
:: 0015 ::
寵得志則揚揚而傲失志則切切而怨此人主之酖毒國家之厲階也願自今因事奏對講讀召對外勿許擅入獨對宗戚承候亦有防限勿令無時出入飮食進御除御廚常供外外國珍品私家褻味絶不納禁中宦妾掖隷定有恒數禁察其出入勿令閒雜人相通外使召接勿許屛人密奏以尊國體己亥七月除秘書院丞九月遷分秘書丞時科擧久廢敎育多方人倫斁敗學費甚廣移書學部曰今學校官立止於京師數區而其費尙患難贍遑及於兆民之衆而遍設以敎育乎遊學之
:: 0016 ::
費一人一年之資不下於六七百元則一國之民庸可盡學於外國哉求才之政莫先於鄕貢德行道藝之選賓興秀造之序載在方策可按而行特以古今異宜規模節目不害其略有損益若其鄕升於州州升於國則歷千載而不可改也庚子五月敕敍中樞院議官上政府帖略曰今日所當奏定者惟釋奠之禮養士之節奬學之規選士之法招賢堂學制之設置成均館官制之改定而未知何所憚而不卽擧行也辛丑正月拜侍從院分侍從四月以憲宗神輦侍衛入參璿源殿各室影幀還安六月上疏辭
:: 0017 ::
職尋拜平理院檢事先時濟州民殺其地西學敎徒數百人囚本院不分首從久屬疑案遂窮査得情罪倡魁而放其餘外使頗嚇之不爲動九月復拜中樞院議官十月請由還鄕十二月入京承命製進圜丘宗廟社稷告由文又製進石鼓閣上樑文壬寅上疏請矯錢幣疏略曰今所謂白銅貨者由於奸臣病國肥己之圖而貪小利而忘大患鼓鑄日濫價格日落今不過一枚銅錢矣以府庫之利坐失百分之八十而猶以爲富國之源者不亦愚乎又擬上矯救方略六條疏癸卯五月以英陵端午祭獻官阻
:: 0018 ::
水不及期翌日始抵僉曰天所沮不宜報公曰欺上倖免吾不敢入京待罪免官閏五月特命免懲戒六月復拜中樞院議官是歲與多士上疏請改文憲公性齋許先生諡註國有大喪而止甲辰正月上疏論韓日協約疏略曰近日一事不經詢議潛自擅行風聞所及大驚且愕雖合九州之鐵不能鑄此一錯祖宗五百年基業國家三千里疆土將非陛下有也高廟神靈寧不痛衋於陟降之天也有韓日協約議定書自外部調印而其事甚秘晩始求覽全稿蓋外托親睦內奪國權究其旨意在此則蔽齊而
:: 0019 ::
爲燕在彼則假虞而滅虢其第一款最凶句語有曰韓國施政改善容二字缺忠告云云惡是何言也此何事也如有秕政宜思自改天下萬國安有名爲自主者內政施爲一任他國而猶可以爲國者乎其辱國之恥喪邦之禍臣不忍泚筆而以陛下之明達寧或未燭於此哉未審陛下知之而莫之禁歟抑不知而爲其所瞞也歟雖古賣國之賊如張松秦檜之徒尙不忍爲此矣噫彼外部署理大臣李址鎔縱云乳臭沒覺之人其地則懿親也其官則大臣也何忍以國媚人至此之甚也聞有一具完喜者素以雜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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邀遊二國圖得該部參書之官誤了無識之址鎔如是也請將潛自捺印之該大臣李址鎔慫慂做事之參書官具完喜亟正邦刑以雪國恥以謝天下焉疏入留中不下朝廷肅然比之胡銓封事二月有大逆不道罪人浩翼等二十一賊減死之旨上疏爭之疏略曰所謂血約五條乃爲人臣子之所不忍聞不敢道者亂臣賊子從古何限而偶有萌心而失口者猶加顯戮安有聚衆合盟作書捺章有若執契而諉之沒覺而可恕者乎彼凶逆特蒙減死而徒流其將感化而爲善良乎其徒寔繁糾結潛伺誠不知變起
:: 0021 ::
何處禍在何樣伏願亟下反汗之音更令法臣按照法文卽施一律竝將經歲玩獄失刑之法官加以當行之律以正法綱以安宗社焉五月上言事疏疏略曰陛下自壬午以來凡有患難輒下明詔不知幾千百言而曾未幾時官吏之貪黷聚斂猶復前也庶事之怠惰恬嬉猶復前也法理之私枉不公猶復前也政令之翻覆無信猶復前也無一淬勵作新之效而世道漸就汙陷玆曷故焉竊恐陛下所以感人者以言而不以心也願自今凡遇事必先自度於心曰此事廉乎貪乎勤乎怠乎公乎私乎廉則進
:: 0022 ::
之貪則退之勤則勉之怠則戒之公則行之私則已之一以信固守之如是數年政不理國不振財不當兵不强而四隣不服臣請伏誣罔之誅矣答曰言固然矣宜思時措六月命加從二品嘉善大夫七月上疏辭職八月命爲始興稷山按覈使時始興郡守朴嵎陽稷山郡守劉秉應俱爲亂民所殺二字缺 石工六七人亦爲所害卽馳往二郡按事復命仍拜全羅南道巡察使十月自仁川上船向木浦戒從者勿令列郡祇迎討索者施顯罰巡視各郡擧是椎剝侵漁之習不可勝黜究其原則觀察爲貪魁又欲
:: 0023 ::
啗以十萬之貨峻辭卻之卽先列書觀察使金世基剝民之狀覈奏請罷黜闔境肅然未幾承召還之電還至木浦移病政府徑歸鄕第乙巳正月議政府參政趙秉式依公奏本免金世基官令法府拘挐徵辦推還所犯臟物於各郡十二月除靑松郡守兼宣諭使蓋爲當路所惎也以老病屢辭不允仍有便道赴任之命黽勉就職時方伯會各郡郡守期欲剃髮公正色曰國之衰由髮乎國之盛在剃乎方伯無以對丁未七月二十九日病卒于官識不識嗟嘆曰賢宰輔逝矣弟鍾憲等奉柩歸鄕塟于斗巖負
:: 0024 ::
子之原從先兆也會者千餘人配龍城宋氏鎭鳳女府使嚴卿後贈貞夫人墓金浦卯原無嗣以弟鍾憲子肯洙爲子進士早卒三女壻孫永億孫永弼宋世永孫男秉奎秉均秉鎬孫女李秀衡妻孫永億男仁植宗植女安承達妻孫永弼男雨植二女崔洪盧乙鉉妻宋世永男泰福曾孫男琪煥噫公生韋布家纔升內舍襴幞未及乎身而匠作之命已至減省之簿勘訖而管攝諸省之貢案十載七郡皆有成績三執使節均出公選苟不有黼黻皇猷之文綜理事物之才其何能致此哉況領揆之剡泂出常調方伯
:: 0025 ::
之擧實非阿私直指之啓定有實見者乎余於公齒不及十四才不及十駕而公猶不棄相對敷心腹嘗以時事策示之曰人有以此而病我者子其詳視之余讀畢斂衽曰以余所見彼所以病之者乃今日康濟之術也相笑而罷余在京有時訪公第時方臘晦朋遊之窮不能自食者公輒以柴粮而周之余心自語曰公在家妻子有寒餓色得此而不自謀公之志可見也後過公鄕第方治屋貨乏不能覆棟桷生淥時公宰興海余又心自語曰五郡之廩必厚而屋未覆公之政可知也及公之葬聞稚孫斥孱土而營
:: 0026 ::
辦余私自歎曰公誠賢矣哉嘗聞公在郡以俸餘納于兄庫而無私藏公之行可慕也昔苔巒先生宰南原有廉白聲灌圃魚公後過南原見齊民頌惠不衰歎曰立朝盡言不諱居官民悅無疆公所以盡言於朝遺惠于民者實有自來也秉奎與從祖叔父副尉鳳洙請勘整遺草于相稷因以公事行要爲編列謹據公族子和鎭所錄參以昔所聞覩而書之使之奉質于立言家云爾
嘉善大夫行全羅南道巡察使石荷安公行狀
公諱鍾悳初諱彦澤字兌老號石荷安氏廣州人系出高麗大將軍諱邦傑之後中郞將諱國柱麗亡守罔僕節生諱岡生員我太宗徵察訪不就三傳而有諱覯司諫號苔巒佔畢齋金先生門人又三傳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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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諱餘慶生員號玉川享冠山別祠諱璹正郞號樂園受業于寒岡先生諱翔漢宣敎郞號東巒丙子倡義是爲公十世九世八世祖也東巒之曾孫曰信亨生五子第二諱景晉第三諱景愚諱景晉生諱珩重是爲公曾王考也祖諱孝庠禰諱貞遠妣交河盧氏光健女檜山黃氏泳女諱景愚生諱瑩重是爲公本生曾王考也祖諱孝準考諱聞遠號溪广有志行妣眞城李氏師淳女退溪先生後驪興閔氏良魯女友于亭九淵後也憲廟辛丑十月九日公生于府東金谷僑第閔氏出也六歲能集字爲詩七歲犯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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聞伯氏誦賈誼疏證之曰某字漏某句闕家貧無以習寫見片紙輒書未幾頗得妙十餘歲詞藻敷發人爭傳誦十四赴慶州公都會題出便下筆詞翰俱贍敏觀者口呿讀書不務遍數及對人討論不遺小註而說其歸趣弱冠聲稱已藉菀庚申丁本生父憂壬戌丁本生母憂制闋聞性齋許先生倡學于金州往拜焉時設白場中壯元明日行鄕飮酒禮選爲讀約自是往來質疑論畢齋先生門人錄遊京城卿士大夫倒屣迎之嘗遊海西歸渡碧瀾津有詩曰一年黃海客斜日碧瀾津舟過中流急回思未渡人人許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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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物之志壬午二月應製中進士御史李道宰薦于朝八月除繕工監假監役領揆洪淳穆以前監役金炳昌田愚柳道性李象弼兪鎭泰及公啓請調用付龍驤衛副司果十月應進士榜時上憂民國經費艱絀命諸大臣會戶惠堂自御用膳服宮掖員數至京外宂官吏隷濫額宂費商確而裁減之充公爲減省廳會員尋改稱會員爲令考閱文簿十一月命八道四都守臣薦孝廉才諝各一人試於太學慶尙則監司尹滋承以公薦上試李應辰問時事公以策對凡屢千言擢第一曰經國手也許令常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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會試十二月減省文簿畢癸未正月差宣惠廳湖西郞廳兼管諸道四月夫人訃至請由還鄕五月行葬禮因大臣筵奏命該守令促令赴職甲申三月陞通訓時有本廳貢案釐正之命懲倉卒奸蠹矯船軍痼瘼堂上閔台鎬雖總管而公實贊畫焉廳隷挾掖勢病船卒諸僚不能禁公慨然曰沮於下而法不行朝廷之恥也將朝暮斥退廳隷知其不能回乘夜進曰自內有密旨請具帽帶公正色曰內旨豈汝輩所傳者哉明當有處置隷自伏乞哀翌日乃斥去五日有衣製變更之令公與閔公台鎬書曰國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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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弱兵制之弛豈可諉於衣服之罪乎今日急務非無加於此者何汲汲焉遽變先王之遺制自歸變於夷之科乎十月金玉均作亂上移御下都監各殿移御覺心寺閔公已被害惠廳堂上闕上命公攝行有召命促輸稅米五百斛以供各殿粮料公奉命蒼黃搜私庫米七十石輸進于覺心寺乘夜步出江口適湖南稅船上來卽輸入四百斛于行在上面諭曰夜寒江險得無勞乎尋還御景福宮陪從焉乙酉二月伯氏中生員請由還鄕六月仕滿遞職八月除義禁府都事尋遷掌樂院主簿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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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遷親軍左營文案丙戌正月出爲聞慶縣監地僻弊劇稱難治公曰不敎而罪之罔民也作文揭示坊曲興學校務農桑勸孝友懲淫詖凡十餘條未期年績成十二月移守盈德縣聞慶民立去思碑治盈一如聞慶戊子歲大荒捐俸賑民申省得貨五百貫米五百石以救之歌誦盈途己丑正月移守梁山郡革校弊正鄕俗節目以勸懲之辛卯正月移大興郡懲土豪輩奪人庄土者而覓還之隣郡有積年疑獄公爲査官徒行閭里而得其情罪元犯者釋被誣之囚人稱神明十月移興海郡捐俸資講學入校宮行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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飮酒禮繡衣金思轍啓曰興海郡守安某莅未幾朔民誦來暮忠淸御史李重夏啓曰大興前郡守安某文識贍敏吏才通鍊躬執亂簿錙銖無遺裁決滯務繩墨不差察隱瘼而刷宿逋遽然移符民皆攀轅而號甲午九月除蔚山府使歲値六歉捐俸設賑流民還集丁酉四月以眞殿營建所別監董被召入京九月陞正三品敍中樞院議官八月上疏請肅淸宮禁疏略曰近日所謂別入侍非古制伺候左右以私覿爲榮者皆小人也以密告爲忠者皆奸謀也此輩競進爭恩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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寵得志則揚揚而傲失志則切切而怨此人主之酖毒國家之厲階也願自今因事奏對講讀召對外勿許擅入獨對宗戚承候亦有防限勿令無時出入飮食進御除御廚常供外外國珍品私家褻味絶不納禁中宦妾掖隷定有恒數禁察其出入勿令閒雜人相通外使召接勿許屛人密奏以尊國體己亥七月除秘書院丞九月遷分秘書丞時科擧久廢敎育多方人倫斁敗學費甚廣移書學部曰今學校官立止於京師數區而其費尙患難贍遑及於兆民之衆而遍設以敎育乎遊學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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費一人一年之資不下於六七百元則一國之民庸可盡學於外國哉求才之政莫先於鄕貢德行道藝之選賓興秀造之序載在方策可按而行特以古今異宜規模節目不害其略有損益若其鄕升於州州升於國則歷千載而不可改也庚子五月敕敍中樞院議官上政府帖略曰今日所當奏定者惟釋奠之禮養士之節奬學之規選士之法招賢堂學制之設置成均館官制之改定而未知何所憚而不卽擧行也辛丑正月拜侍從院分侍從四月以憲宗神輦侍衛入參璿源殿各室影幀還安六月上疏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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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尋拜平理院檢事先時濟州民殺其地西學敎徒數百人囚本院不分首從久屬疑案遂窮査得情罪倡魁而放其餘外使頗嚇之不爲動九月復拜中樞院議官十月請由還鄕十二月入京承命製進圜丘宗廟社稷告由文又製進石鼓閣上樑文壬寅上疏請矯錢幣疏略曰今所謂白銅貨者由於奸臣病國肥己之圖而貪小利而忘大患鼓鑄日濫價格日落今不過一枚銅錢矣以府庫之利坐失百分之八十而猶以爲富國之源者不亦愚乎又擬上矯救方略六條疏癸卯五月以英陵端午祭獻官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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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不及期翌日始抵僉曰天所沮不宜報公曰欺上倖免吾不敢入京待罪免官閏五月特命免懲戒六月復拜中樞院議官是歲與多士上疏請改文憲公性齋許先生諡註國有大喪而止甲辰正月上疏論韓日協約疏略曰近日一事不經詢議潛自擅行風聞所及大驚且愕雖合九州之鐵不能鑄此一錯祖宗五百年基業國家三千里疆土將非陛下有也高廟神靈寧不痛衋於陟降之天也有韓日協約議定書自外部調印而其事甚秘晩始求覽全稿蓋外托親睦內奪國權究其旨意在此則蔽齊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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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燕在彼則假虞而滅虢其第一款最凶句語有曰韓國施政改善容二字缺忠告云云惡是何言也此何事也如有秕政宜思自改天下萬國安有名爲自主者內政施爲一任他國而猶可以爲國者乎其辱國之恥喪邦之禍臣不忍泚筆而以陛下之明達寧或未燭於此哉未審陛下知之而莫之禁歟抑不知而爲其所瞞也歟雖古賣國之賊如張松秦檜之徒尙不忍爲此矣噫彼外部署理大臣李址鎔縱云乳臭沒覺之人其地則懿親也其官則大臣也何忍以國媚人至此之甚也聞有一具完喜者素以雜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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邀遊二國圖得該部參書之官誤了無識之址鎔如是也請將潛自捺印之該大臣李址鎔慫慂做事之參書官具完喜亟正邦刑以雪國恥以謝天下焉疏入留中不下朝廷肅然比之胡銓封事二月有大逆不道罪人浩翼等二十一賊減死之旨上疏爭之疏略曰所謂血約五條乃爲人臣子之所不忍聞不敢道者亂臣賊子從古何限而偶有萌心而失口者猶加顯戮安有聚衆合盟作書捺章有若執契而諉之沒覺而可恕者乎彼凶逆特蒙減死而徒流其將感化而爲善良乎其徒寔繁糾結潛伺誠不知變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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何處禍在何樣伏願亟下反汗之音更令法臣按照法文卽施一律竝將經歲玩獄失刑之法官加以當行之律以正法綱以安宗社焉五月上言事疏疏略曰陛下自壬午以來凡有患難輒下明詔不知幾千百言而曾未幾時官吏之貪黷聚斂猶復前也庶事之怠惰恬嬉猶復前也法理之私枉不公猶復前也政令之翻覆無信猶復前也無一淬勵作新之效而世道漸就汙陷玆曷故焉竊恐陛下所以感人者以言而不以心也願自今凡遇事必先自度於心曰此事廉乎貪乎勤乎怠乎公乎私乎廉則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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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貪則退之勤則勉之怠則戒之公則行之私則已之一以信固守之如是數年政不理國不振財不當兵不强而四隣不服臣請伏誣罔之誅矣答曰言固然矣宜思時措六月命加從二品嘉善大夫七月上疏辭職八月命爲始興稷山按覈使時始興郡守朴嵎陽稷山郡守劉秉應俱爲亂民所殺二字缺 石工六七人亦爲所害卽馳往二郡按事復命仍拜全羅南道巡察使十月自仁川上船向木浦戒從者勿令列郡祇迎討索者施顯罰巡視各郡擧是椎剝侵漁之習不可勝黜究其原則觀察爲貪魁又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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啗以十萬之貨峻辭卻之卽先列書觀察使金世基剝民之狀覈奏請罷黜闔境肅然未幾承召還之電還至木浦移病政府徑歸鄕第乙巳正月議政府參政趙秉式依公奏本免金世基官令法府拘挐徵辦推還所犯臟物於各郡十二月除靑松郡守兼宣諭使蓋爲當路所惎也以老病屢辭不允仍有便道赴任之命黽勉就職時方伯會各郡郡守期欲剃髮公正色曰國之衰由髮乎國之盛在剃乎方伯無以對丁未七月二十九日病卒于官識不識嗟嘆曰賢宰輔逝矣弟鍾憲等奉柩歸鄕塟于斗巖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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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之原從先兆也會者千餘人配龍城宋氏鎭鳳女府使嚴卿後贈貞夫人墓金浦卯原無嗣以弟鍾憲子肯洙爲子進士早卒三女壻孫永億孫永弼宋世永孫男秉奎秉均秉鎬孫女李秀衡妻孫永億男仁植宗植女安承達妻孫永弼男雨植二女崔洪盧乙鉉妻宋世永男泰福曾孫男琪煥噫公生韋布家纔升內舍襴幞未及乎身而匠作之命已至減省之簿勘訖而管攝諸省之貢案十載七郡皆有成績三執使節均出公選苟不有黼黻皇猷之文綜理事物之才其何能致此哉況領揆之剡泂出常調方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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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擧實非阿私直指之啓定有實見者乎余於公齒不及十四才不及十駕而公猶不棄相對敷心腹嘗以時事策示之曰人有以此而病我者子其詳視之余讀畢斂衽曰以余所見彼所以病之者乃今日康濟之術也相笑而罷余在京有時訪公第時方臘晦朋遊之窮不能自食者公輒以柴粮而周之余心自語曰公在家妻子有寒餓色得此而不自謀公之志可見也後過公鄕第方治屋貨乏不能覆棟桷生淥時公宰興海余又心自語曰五郡之廩必厚而屋未覆公之政可知也及公之葬聞稚孫斥孱土而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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辦余私自歎曰公誠賢矣哉嘗聞公在郡以俸餘納于兄庫而無私藏公之行可慕也昔苔巒先生宰南原有廉白聲灌圃魚公後過南原見齊民頌惠不衰歎曰立朝盡言不諱居官民悅無疆公所以盡言於朝遺惠于民者實有自來也秉奎與從祖叔父副尉鳳洙請勘整遺草于相稷因以公事行要爲編列謹據公族子和鎭所錄參以昔所聞覩而書之使之奉質于立言家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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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횡묵, 叢瑣錄v9 야화안핵사안종덕[夜話按覈使安鍾悳]
送罷南樓阻候門 同參覈事更承溫 致身要識丹衷在 曾見憂時奏萬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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