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남명 조식

쉬어가는 여유 2011. 11. 1. 09:58

16세기 중엽 지리산 자락에는 지리산처럼 우뚝한 선비 남명 조식이 살고 있었다. 낮은 벼슬자리 한 번 지낸 적 없건만 그 주변에는 늘 제자들이 들끓었고 임금도 자주 벼슬을 내리거나 조언을 구했다. 조선시대 경상도는 우도와 좌도로 나뉘어져 있었다. 좌우의 구분은 임금이 중심인 사회였기 때문에 임금이 서울에서 바라볼 때 낙동강 오른쪽에 있는 진주 상주 김해가 우도에 속하고 왼쪽에 있는 경주, 안동, 대구가 좌도에 속했다. 이 지역들은 일제가 철도를 건설하면서 일본 상인들의 힘을 새롭게 키우기 위하여 기존 거점도시들을 비켜가게 한 까닭에 대부분 몰락한 곳이 되었지만, 조선시대 내내는 경주와 상주가 중심이어서 경상도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남명 조식 영정 조선 중기 좌도의 상징은 퇴계 이황(1501-1570)이었고 우도의 상징은 남명 조식(1501-1571)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 태어나 한 해 차이로 세상을 떴지만 이황이 대제학과 예조판서에 이르기까지 여러 벼슬을 지낸 것과 달리 조식은 일체 벼슬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어쩔 수 없어 벼슬을 사양하러 서울로 가서도 임금만 만나고 도로 내려왔을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학덕으로는 대제학을 지내고도 남고 능력으로는 3정승 6판서를 하고 넘치면서도 아예 그런 자리를 거들떠보지 조차 않은 사람을 처사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조식은 처사로서 경상우도의 상징이었던 인물이다. 당시 처사로 꼽히던 사람은 화담 서경덕, 대곡 성운, 남명 조식뿐이었다. 세상을 떠나 살던 이 세 사람이 1557년 속리산에서 만난 일은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세상일에 초연한 처사 세 명이 속세를 떠나 있는 산이라는 뜻의 속리산(俗離山)에서 만났으니 그 아니 그랬겠는가.
조식은 벼슬에 있는 사람들과 만나는 일조차 꺼렸다. 한 번은 경상도 관찰사로 와 있던 회재 이언적이 조식을 흠모하여 한 번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을 때에도 '당신이 벼슬을 놓고 시골로 돌아갔을 때 댁으로 찾아 뵙겠다'며 고사했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같은 경상도에서 많은 시간을 머물렀던 이황과도 서로 흠모하고 존경하는 편지를 다섯 번 주고받았을 뿐 만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경상도 선비들 가운데에는 이황과 조식 두 문하를 다 드나든 사람들도 상당 수 있다. 두 문하를 오간 한강 정구는 뒷날 선조가 두 사람을 평해보라고 했을 때 '조식은 천길 절벽 같아서 길을 찾아 들어가기가 어렵고 이황은 평탄한 길이 곧게 뻗어 있는 것 같아 길을 들어서기가 쉽습니다.'고 하였고, 하겸진은 두 사람에 대해 '이황은 도를 밝히는 일에 힘썼고 조식은 세상의 잘못을 바로 잡는 일에 힘썼다'고 하였다. 오늘날도 안동을 중심으로 이황이 높여진다면 조식은 진주를 중심으로 높여지고 있다.

'나아갈 때 나아가고 머물 때 머문다'

조식은 지금의 경남 합천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몸가짐 또한 늘 어른스러웠고,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가 시험 삼아 『시경』과 『서경』을 가르쳤는데 가르친 대목을 금방 외웠을 뿐 아니라 며칠 뒤 다시 물어도 잊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아홉 살 때 큰 병이 들어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사회와 나라를 위하여 무슨 일인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크건 작건 훌륭한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째서 오늘 갑자기 죽을까봐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7세 무렵 아버지 조언형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가게 됨에 서울로 따라 올라갔고, 그 뒤 여러 선비들을 사귀면서 자신의 학문을 만들어 갔다.
산천재. 여기 있는 매화는 영남지방의 3매 중 하나로 유명하다. 인근의 정당매와 함께 천연기념물에 가까운 우리 나라 토종 매화나무로 남명선생 생시부터 있었다. 이른 봄에 조그만 하얀 꽃을 피운다. 하지만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설 무렵 기묘사화가 터지면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가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고, 조식의 작은 아버지 또한 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당시 상황에 충격을 받은 조식은 문과 시험에 한 번 응시하여 떨어지고 난 뒤부터 다시는 벼슬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리고 일생 재야에 묻혀 학문을 닦고 인재를 기르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조식은 38세 되던 해 나라에서 참봉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과 함께 지금이 나아갈 때인지 머물러야할 때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선비였으며, 물러나 진리를 굳게 지킬지언정 권력에 빌붙거나 굴복하여 벼슬길을 좇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 같은 그의 학문과 실천은 당시 뜻있는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사회를 대하는 이 같은 태도를 유학에서는 출처(出處)라고 한다. 출처는 '나아갈 것인지 머물 것인지'를 가늠한다는 뜻이다. 본래 공자는 『논어』에서 '나라가 질서 잡힌 때에는 말과 행동을 높게 하고, 나라에 질서가 없을 때에는 행동은 높게 하되 말은 공손하게 하라'고 했고, 또 '위험한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세상이 질서가 잡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고 질서가 없으면 숨는다'고도 하였다. 그러니까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에는 참여하여 세상을 돕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에는 물러나서 뒷세상을 위해 후속 세대를 기르는 것이 바른 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를 무도한 사회로 규정한 조식은 처음에는 처가인 김해에 '산해정'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다가 49세 때 외가였던 합천으로 옮겨 '뇌룡정'을 짓고 다시 제자들을 길렀으며, 61세 때에는 지리산 자락 산청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을 길렀을 뿐 일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식은 정말 서릿발 같은 선비정신을 지닌 사람이었다. 조식이 단성 현감을 제수 받고 사직하겠다고 올린 상소문에는 그의 기개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거칠 것 없는 문투로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임금의 잘못이며 벼슬아치들 또한 당파 싸움에 매달릴 뿐 나라를 돌보지 않는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상황을 바로잡으려면 오직 학문에 힘쓰고 덕을 밝혀 올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는 중종이 죽고 큰 아들 인종이 뒤를 이었지만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까닭에 어린 명종이 임금에 올랐다. 따라서 계비였던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그에 빌붙은 문정왕후의 오라비들이 권력을 휘두르던 때였다. 그런데 조식은 그 상소에서 "태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밖의 소식과 단절된 깊은 궁궐 속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선왕(先王)의 나이 어린 고아일 뿐입니다. (중략) 헛된 이름을 팔아 임금의 벼슬을 도적질해서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은 터럭만큼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선비가 숱하게 죽거나 귀양가는 정국을 살면서 권력의 실세인, 수렴청정을 하는 태후에게 그리고 임금에게까지 거칠 것이 없었던 기개는 그의 올곧은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왕위에 오르고 20년 동안 어머니의 수렴청정을 받던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강직한 선비 조식을 잊을 수 없어서 만나기를 청했다. 임금의 거듭된 부름에 마지못해 조식이 한양에 오자 먼발치에서라도 조식의 모습을 보기 위해 구름 같은 인파가 한강 나루터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식은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니 백성을 으뜸으로 여기라'는 간언을 하고는 열하루 만에 제자들이 기다리는 지리산 밑 산천재로 돌아갔다.

재야의 스승이 낳은 57인의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선생의 동상. 남명의 외손녀사위이기도 하다. 임진란 때 의병장이며 싸움이 벌어지면 붉은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맨 앞에서 싸워서 '천강홍의장군'으로 불린다. 그는 일생 재야에 묻혀 지내면서도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엄격해서 잠시라도 자신을 채찍질하고 깨우치는 일을 잊을까봐 늘 소리 나는 방울을 차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학문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선비들처럼 주자학에만 매달리지 않고 이단으로 지목되던 노장 사상과 양명학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병법, 천문, 지리, 역법까지도다양하게 공부하고 가르쳤다. 특히 그의 학문태도와 사회적 실천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조식은 일본의 침략도 미리 내다본 듯 자주 제자들에게 왜인이 침범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시험하고, 병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칼을 찬 유학자'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조식이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20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의 문하에서 57명의 의병장이 나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홍의 장군 곽재우, 합천의 정인홍, 고령의 김면, 황석산성 전투에서 순국한 함양 군수 조종도 등이 모두 그의 제자이다. 그 어떤 고관대작의 부하들보다 많은 의병장을 낳았으니 선비가 언제 나아가고 머물러야 할지 제대로 본을 보인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의 제자들은 사림파를 적극 등용한 선조 무렵부터 벼슬에 나갔고 특히 광해군 때에는 사색당파 가운데 북인으로서 정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무너지는 명나라와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통해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막은 일이나, 어떤 세금이든 모두 쌀로 내게 함으로써 세금제도를 합리화시킨 대동법의 시행 등에 이들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서인들이 인조를 내세워 광해군을 무너뜨릴 때 대부분 축출됨으로써 스승이었던 조식의 학문적 영향마저 묻혀버리고 말았다. 정인홍 등 북인들이 고종 때 복권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조식에 대한 평가가 미미한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