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小訥 盧相稷 선생(高祖父 行狀 讚)

쉬어가는 여유 2012. 2. 28. 13:22

 

 

 

밀양시 단장면 무릉리에 자암서당(紫岩書堂)이 있다. 지금은 인적이 드물어 고요하기까지 한 이 서당에 100년전에는 글읽는 소리 끊어지지 않았다. 밀양을 중심으로 김해 등지의 많은 선비들이 자암서당을 찾았던 것이다. 이처럼 많은 지역 선비들이 자암서당으로 몰려들었던 것은 당시 이곳에 강우학맥의 거유 소눌 소상직이 학문을 연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암서당은 소눌 노상직(小訥 盧相稷. 1855~1931)이 1913년 만주 망명지에서 돌아와 일생을 마칠 때까지 18년간 기거하며 학문 활동을 하던 유서깊은 곳으로 1993년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영재 이건승이 쓴 서당 기문에 "내가 중국 안동현 이수촌에 있을 때 함께 사는 사람들 중에 영남 사람이 많았다. 그 사람들이 말하기를, 노치팔(致八)선생은 영남 노산 아래 은거하여 학문을 닦으니 지금 세상의 손명복(孫明復:중국 송나라때 추앙받는 학자)이다 라고 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흠모했었다. 얼마 후 시강인 노대눌과 사귈 수 있었는데, 시강 역시 영남 사람으로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이곳에 와서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라고 되어 있으니, 소눌이 중국 망명에서 돌아와 학문을 정진하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소눌은 이 서당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면서도 시대의 암울함을 그대로 간과할 수 없었다. 1919년 면우 곽종석 등 유림대표 137인이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 에 문인 14명과 함께 서명했다. 이는 소눌에 의해 형성된 자암서당의 학풍이 우국충정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지를 대변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눌은 1855년(철종 6년) 김해 생림면 금곡리에서 우당 노호연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부는 극재 노필연으로 뒤에 숙부에게 양자로 간 것이다. 5세때 효경을 배우기 시작해 12세때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 향시에 응시했으며 17세 때 당시 김해부사인 박원석이 고을의 자제들을 모아 하과(夏課)를 실시하였는데 여기에 참석을 했다. 21세 때는 대구와 거창의 도회(都會)에 참가했으며, 26세때 동당시(東堂試)에 합격을 했는데, 이해 형 대눌이 별시 문과에 급제를 했다.

 소눌이 이처럼 학문적 자질이 뛰어난 것은 어릴 때부터 부친과 형을 따라 당시 김해부사인 성재 허전의 문하에 드나들었던 까닭이다. 성재 허전이 김해 부사로 부임했을 때 소눌의 나이 11세에 불과했지만 부친을 따라 공여당(公餘堂)에서 성재를 배알한 것이다. 이후 성재가 별세할 때까지 수시로 찾아가 학업을 닦았다. 소눌은 성재 문하에서 당대 영남의 대표적 학자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다. 만성 박치복, 단계 김인섭, 물천 김진호, 일산 조병규 등 산청 함안 등 지역의 학풍을 이끌고 있는 학자들과 교유를 가졌던 것이다.

 소눌은 29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추원재(追遠齋)에서 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학을 시작했다. 이후 37세 때는 순찰사의 추천으로 정식 강장(講長)에 추대되어 추원재에서 고을의 유생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시작하기도 했다.

 고을에서 강학 활동에 열중하던 소눌은 동학이 일어나던 해, 창녕에서 김해로 이주했다가 이듬해 밀양의 금곡(金谷)에서 금산서당(錦山書堂)을 지었다. 이듬해 현재 자암서당이 있는 노곡으로 사는 곳을 옮겨 '자암초려'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인근의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배우러 오는 학생들이 너무많아 임시 거처를 지어 수용을 하기에 이르렀다.

 1903년 군수가 강장으로 천거를 했으나 사퇴하고 강학도 경술국치로 인하여 중단되었다. 경술국치를 당하던 해 형 대눌이 일본 헌병대에 구금이 되었다가 풀려나 그 다음해 10월 만주땅으로 망명을 했는데, 한달 뒤 소눌도 가족들을 데리고 형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안동현에 거주했다. 이때 만주에 망명해 있던 성주 선비 회당 장석영, 의령선비 홍와 이두훈, 경재 이건승 등과 가까이 살면서 교유를 했다. 중국생활도 잠시 이듬해 아들이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을 당하자 소눌은 다시 가족들을 데리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밀양에서 돌아온 소눌은 그 이듬해인 1914년 자암서당을 건립하고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선현들의 문적을 간행하기도 했다.

 1919년 전국유림들이 파리 만국 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를 보내자 이에 제자 14명과 함께 서명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옥에서 나온 소눌은 노곡 근처에 사남서장(泗南書庄)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1926년에는 다시 자암서당을 중수하고 1931년 마산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7세 였다.

 소눌이 세상을 떠나자 원근 각지의 제자들이 천여명이나 몰려들었다고 한다. 당시 동아일보 1931년 3월 23일자에 그의 부음 소식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한학(漢學)의 거벽(巨擘) 소눌 서거 19일 마산서.

 허성재 전의 수제자로 한학의 거벽인 소눌 노상직씨는 당년 77세의 로령으로 지난 19일 오전 5시에 마산부 표정 111번지 우제에서 별세하얏는데 부음을 듯고 각지에서 모여 오는데 제자는 지난 21일까지 천여명에 달하였다. 유족으로는 4형제가 있고 그 백씨되는 대눌은 82세의 고령이며 장례시일은 미정이나 식은 사림장으로 할터이라 한다"

 소눌의 부음을 듣고, 이 지역 선비들이 거의 모여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많은 2000여명의 인파가 몰려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소눌의 학문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케 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일제 강점기, 많은 강우(江右)의 학자들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선현의 학문에 정진하며 뜻을 지키려고 했다. 더러 왜적에 맞서 싸우기도 했으나 역부족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산림에 은거해 제자들을 육성하면서 한 평생을 보낸 학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 주위의 서당 재실(齋室)들이 거의 폐가가 되다시피 한 것들이 많지만 불과 100년전에는 글읽는 소리가 온 동네를 울렸던 것이다.

 밀양의 자암서당(紫岩書堂)에도 100년전에는 글읽는 소리가 낭랑히 올려 퍼졌던 곳이다. 대학자 소눌 노상직(小訥 盧相稷. 1855~1931)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눌은 자암서당에 있으면서 사방에서 공부하러 온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기쁜 마음으로 제공했다.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학도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소눌이 자암서당에서 학도들을 지도할 때 모습은 지금도 '자암일록(紫巖日錄)'이란 기록으로 전한다.

 "날마다 일직(日直) 한사람을 정하여 선한 행동과 나쁜 행동을 기록하게 한다. 또 유사(有司) 두사람을 정하여 검사하고 고찰하며 유도하는 책무를 겸하게 한다. 식사 때는 나이 차례대로 앉아 읍을 한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일직은 경재잠(敬齋箴)을 외우는데 문생들은 엎드려 듣는다. 낮에는 강설(講說) 과독(課讀) 혹은 작문(作文) 혹은 작시(作詩)등으로 그 시간에 따라 자기의 할 일을 다한다. 저녁에는 각자가 잠(箴)과 명(銘)을 외우며 또한 나이의 차례대로 서서 읍을 하는데 비록 혹독한 더위라 하더라도 그만두지 않는다. "

 소눌이 제자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도했는가를 알 수 있다. 흡사 마을의 향약이 연상될 정도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배우는 사람의 자세를 잃지 않도록 지도한 흔적이 엿보이는 글이다.

 소눌의 이러한 교육은 일찍이 가학(家學)과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소눌은 성재 허전의 문인이다. 소눌의 나이 11세 때 부친을 따라 김해 부사로 부임한 성재를 배알했다. 성재에게 학문을 수학한 소눌은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허운(許運)과 성재 문집 초고인 '용어(庸語)'와 연보를 정리하고 성재의 행장을 지었다. 일반적으로 스승의 행장을 수제자가 짓는다는 것을 상기할 때 소눌은 성재의 고족(高足)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육천재(育泉齋) 안붕언(安朋彦 1904~1976)이 지은 '소눌노선생 묘갈명(小訥盧先生墓碣銘)'에 의하면 "선생은 기호남인과 영남 남인의 학문을 한 용광로에 녹여서 회통하였다. 그러므로 그 거대한 규모와 효용은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는데다 더욱 우뚝이 뛰어났다(중략)퇴계의 학문 근원이 한강 정구를 거쳐 미수 허목,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하려 황덕길, 성재 허전까지 적통으로 전수되었는데, 선생은 이를 계승하여 큰 대전(大全)을 얻었다." 라고 되어 있다.

 이글에서 육천은 소눌의 학문을 기호 남인과 영남 남인의 학문을 모두 섭렵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소눌의 학문이 한강 정구에 닿아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소눌의 선대는 한강 정구와 사승관계를 맺고 있는데, 선조인 옥촌(沃村) 노극홍(盧克弘)이 한강의 문하에 출입한 것으로 비롯된다. 소눌의 지우(知友) 예강(禮岡) 안언호(安彦浩)는 "결백한 행실과 뛰어난 재능을 겸하였다/한 몸의 삶과 죽음이 하늘의 운과 연결되었으니/연원은 한강 선생의 정맥에서 나왔고/문호는 옥촌 선조의 어진 가문을 계승했다"라고 했다.

[img2] 소눌은 이러한 학문적 연원을 바탕으로 중년 이후 평생을 강학을 본분으로 삼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암서당에서 강학을 하기 전에도 29세 때는 추원재(追遠齋)에서, 34세 때는 극기재(克己齋)에서 강학을 한 것을 비롯해 창녕 금곡의 금산서당(錦山書堂) 밀양의 자암초려(紫巖草廬) 등지에서도 제자들을 가르쳤다.

 소눌의 학문은 실학(實學)을 기반으로 두고 있다. 이는 스승인 성재가 실학자 성호 이익의 학맥을 계승한데서도 잘 알 수 있을 뿐더러 소눌 자신이 공리공담(空理空談)보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했다는데서 알 수 있다.

 소눌은 '입지(立志)'와 '무욕(無慾)'을 공부의 요점으로 삼았다. 입지가 굳지 않으면 공리공담에 머물게 되고, 욕심을 챙기면 성현들의 그림자도 쫓아갈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소눌은 "욕심은 도적과 같아서 오로지 나의 허점을 염탐해 쳐들어온다. 한가한 곳이라도 방어하여야 하니 치밀하지 않으면 그 사이를 틈타 스며들게 된다"라고 하면서 사사로운 욕심을 경계하고자 무척 애를 썼다.

 소눌은 당시 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성리학에는 그다지 신경을 써지 않은 것 같다. 평생 성현의 학문을 궁구해 온 소눌이 성리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은 시대상황과 무관치 않다고 여겨진다.

 조선조 후반기에 와서 사단칠정(四端七情) 이기(理氣)의 문제로 학자들 사이에 수많은 논쟁들이 있었다. 이런 논쟁들은 본래 사물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 사물에 정확하게 대처하고 심성의 올바른 수양 방법을 파악하기 위한 것으로 정밀과 엄정을 추구하는 학문의 본질상 피할 수 없는점이 있지만 논쟁이 지나쳐 자기 스승의 학설을 옹호하는데 급급하여 당파간 간극을 심화시키는 병폐도 있었다. 소눌은 이러한 성리설의 논쟁을 경계한 것이다.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현들의 가르침을 체득하고 실천하는데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선현이 이미 밝힌 성리의 이론을 문자 언어로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 급선무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소눌은 마산에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기까지 많은 저술들을 남겼다. '성재선생문집(1888)' '성호문집(1917)' '하려집(下廬集 1918)' 등 근기학파의 정맥을 이은 대학자들의 문집 간행을 주도했으며, '방산집' '한주집' 등 선배들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또한 '동국씨족고(東國氏族考)' '역대국계고(歷代國界考)' '역대제강(歷代提綱)' 등 30여권의 저서를 남기고 25책에 달하는 소눌문집을 남기기도 했다.

 소눌은 젊은 시절에는 당대 대유학자들을 통해 유가(儒家)의 학문을 배웠고 장년시절에는 혼란을 당하여 강학과 저술을 통하여 그 학문을 계승하고 선양하는데 힘을 쏟았다.그의 언행과 강학과 출판 저술은 20세기 초 일본제국의 패권주의적 식민통치 상황에서 민족문화를 말살 하려는 정책에 대한 소리없는 저항이며 민족 정신을 고취시키는 문화운동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이러한 학문과 정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옛날 글읽는 소리 낭랑했던 밀양 자암서당도 이제는 인적이 끊겨 바람 소리만 쓸쓸할 뿐이다.


 
 <소눌문집 책판>
[img3] 지금 밀양시립 박물관에는 소눌 문집 책판이 보관돼 있다. 이 책판은 소눌의 문집을 비롯하여 소눌이 1913년에 망명지 만주에서 돌아와 1931년 일생을 마칠 때까지 18년 동안 저술한 많은 서적의 판본을 모두 모은 것이다. 소눌의 주요 저술로는 허미수년보(許眉수年譜), 동국씨족고(東國氏族攷),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성리절요(性理節要), 동국유현편연(東國儒賢編年), 영지요선(嶺地要選), 역연제강(歷年提綱), 가락국사실고(駕洛國事實攷), 상례편람(常禮便覽), 여사수지(女士須知)등을 들 수 있는데 문화 사상 관계는 물론 역사, 지리, 경제, 여성교양에까지 다양한 내용들이 반영돼 있다.

 책판의 수량은 소눌문집(小訥文集)이 25책에 750장(張)이고 기타 저술서적이 수십책에 2,100장이 넘어 모두 2,800여장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목판(木板)이다.

 이 문집의 내용은 시(詩), 서(書), 소(疏), 잡저(雜著), 서기(序記), 발(跋), 명(銘), 잠(箴), 상량문(上樑文), 축문(祝文), 제문(祭文), 뢰사비명(뢰詞碑銘), 묘갈(墓碣), 묘표(墓表), 행장(行狀), 년보(年譜), 유사(遺事), 전(傳)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