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학교 후문 근처
안동의진의 1차 대장 권세연이 물러나자 김도화는 3월 13일 안동의진의 대장에 추대되었다. 3월 14일 대장에 취임한 후 류난영(柳蘭榮)을 도총(都摠)에, 김흥락과 류도성을 지휘장에 선임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다. 또 의병을 일으킨 뜻을 왕에게 아뢰는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를 올리고 각지로 격문을 발송하는 한편 인근 지역에도 의병을 모으는 소모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태봉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권문팔(權文八)을 대표로 삼아 안동의병 250여 명을 파견하였다. 3월 26일 예천에서 안동 지역의 6개 의진과 제천의 호좌의진(湖左義陳)은 연합전투를 다짐하였고, 3월 29일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태봉 전투의 패배 이후 다시 병력을 보충하여 의진을 정비하고 전투 준비를 갖추었으나 8월 영남 지역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칙령이 안동부에 도착하고 이어 9월 11일 관군이 안동부에 도착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의진을 해산했다. 이에 따라 약 9개월에 걸친 안동의진 항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파오조약소(請罷五條約疏)」, 「포고만국문(布告萬國文)」, 「포고각국공사문(布告各國公司文)」을 작성하였다. 1910년 끝내 일제 강점으로 나라가 망하자 “국가의 통치 권한이 폐하의 사유가 아니고,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 사물(私物)이 아닙니다. 폐하, 어찌하여 필부들이 자기 논밭을 매매하듯이 해버렸습니까?”라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고, 1912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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