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拓庵 金道和

쉬어가는 여유 2012. 3. 12. 12:39

▶경북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학교 후문 근처

 

  • [정의]
  • 조선 말기 안동 출신의 의병장.

  • [개설]
  • 김도화는 본관이 의성, 자는 달민(達民), 호는 척암(拓庵)이며, 한말 안동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 [활동사항]
  • 김도화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귀미리에서 아버지 김약수(金若洙)와 곡구처사(谷口處士) 정상관(鄭象觀)의 딸인 어머니 진양정씨(晉陽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김흥락(金興洛), 류지호(柳止鎬) 등과 더불어 안동의진 결성을 결의하고 「안동통문(安東通文)」 작성에 참여하였다. 1896년 1월 20일 안동의진이 구성될 때 여러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봉화 유곡(酉谷, 닭실) 출신 권세연(權世淵)을 의병장으로 뽑았다.

    안동의진의 1차 대장 권세연이 물러나자 김도화는 3월 13일 안동의진의 대장에 추대되었다. 3월 14일 대장에 취임한 후 류난영(柳蘭榮)을 도총(都摠)에, 김흥락류도성을 지휘장에 선임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였다. 또 의병을 일으킨 뜻을 왕에게 아뢰는 「창의진정소(倡義陳情疏)」를 올리고 각지로 격문을 발송하는 한편 인근 지역에도 의병을 모으는 소모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태봉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권문팔(權文八)을 대표로 삼아 안동의병 250여 명을 파견하였다. 3월 26일 예천에서 안동 지역의 6개 의진과 제천호좌의진(湖左義陳)은 연합전투를 다짐하였고, 3월 29일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방전 끝에 태봉 함락은 실패로 돌아갔다.

    태봉 전투의 패배 이후 다시 병력을 보충하여 의진을 정비하고 전투 준비를 갖추었으나 8월 영남 지역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는 고종의 칙령이 안동부에 도착하고 이어 9월 11일 관군이 안동부에 도착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의진을 해산했다. 이에 따라 약 9개월에 걸친 안동의진 항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파오조약소(請罷五條約疏)」, 「포고만국문(布告萬國文)」, 「포고각국공사문(布告各國公司文)」을 작성하였다. 1910년 끝내 일제 강점으로 나라가 망하자 “국가의 통치 권한이 폐하의 사유가 아니고,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 사물(私物)이 아닙니다. 폐하, 어찌하여 필부들이 자기 논밭을 매매하듯이 해버렸습니까?”라는 내용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고, 1912년 8월 7일 세상을 떠났다.

  • [저술 및 작품]
  • 위기지학에 힘써 ‘숙흥야매(夙興夜寐) 온고지신(溫故知新)’ 여덟 글자를 벽에 붙여 놓고, 사서(四書)와 태극도(太極圖)·서명(西銘)·근사록(近思錄)·역번(易繁)·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에 침잠하였다.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을 하니, 류치명은 ‘전척(展拓)’ 두 글자를 써줌에 이로써 ‘척암(拓庵)’으로 아호했다. 문집으로 『척암집(拓庵集)』이 있다.

  • [묘소]
  • 묘소는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학교 후문 근처에 있다.

  • [상훈과 추모]
  • 1983년에 대한민국건국포장이, 1990년에 대한민국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자료집』1~1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8)
    • 『의병항쟁사』(제2군사령부, 1980)
    • 김구현, 『척암 김도화 선생의 의병투쟁과 애국정신』(한빛, 1998)
    • 김희곤, 『안동 독립운동가 700인』(안동시, 2001)
    • 강윤정, 「정재학파의 현실인식과 구국운동」(단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관련항목]
     • 권세연
     • 귀미리
     • 김흥락
     • 류지호
     • 송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