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密陽의 人物(佔畢齋 金宗直의 考察)

쉬어가는 여유 2012. 4. 10. 12:13

 

 

김종직(金宗直, 1431년6월 ~ 1492년 8월 19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 권우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정계에 진출한 이는 정몽주,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密陽) 佔畢齋김종직(金宗直)墓·神道碑-善山金氏-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701

 

[神道碑閣에서 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묘역]

  김종직[金宗直, 세종 13년(1431)∼성종 23년(1492)],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한 때 문간(文簡)], 본관은 선산(善山), 증조는 김은유(金恩宥), 조부는 김관(金琯), 아버지는 사예 김숙자(金叔滋), 어머니는 좌군병마사 박홍신[朴弘信, 이종무(李從茂)장군의 대마도 출정 때 전사]의 따님 밀양박씨, 초배는 울진현령 조계문(曹繼門)의 따님 창녕조씨, 계배는 첨정 문극정(文克正) 따님 남평문씨이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묘]

  단종 1년(1453) 진사하고, 세조 5년(1459) 식년문과 급제, 사가독서하여, 승문원박사겸예문관봉교를 시작으로 사헌부감찰·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선산부사·우부승지·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형조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봉분]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의 종조가 되었고, 문하생으로는 일두 정여창(鄭汝昌)·한훤당 김굉필(金宏弼)·탁영 김일손(金馹孫)·임계 유호인(兪好仁)·추강 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이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묘 좌측 석물]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묘 우측 석물]

 

 

  김종직은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키므로서 훈구파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이들 훈척계열의 유자광(柳子光)·정문경(鄭文烱)·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으로 빚어진 일이라 그도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묘 후경]

  그 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밀양의 예림서원, 선산의 금오서원, 함양의 백연서원, 김천의 경렴서원, 개령의 덕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묘 후경]

  저서로 《점필재집》·《유두류록(遊頭流錄)》·《청구풍아(靑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一善誌)》·《이존록(彝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지금 전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김종직(金宗直) 묘갈]

  김종직의 묘갈명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수제자 수암 권상하(權尙夏)가 지었다.

 

 

 

[김종직(金宗直) 신도비]

  이 비는 홍귀달(洪貴達)이 찬하고, 오여발(吳汝撥)의 서, 김세렴(金世濂)이 전액하여 1634년에 세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