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嘉善大夫行巡察使石荷廣州安先生之墓墓碣銘幷序(36 世 高祖父)

쉬어가는 여유 2017. 9. 27. 14:30

 

嘉善大夫行巡察使石荷廣州安先生之墓墓碣銘

近故嘉善大夫全羅巡察使石荷安公이 丁未年(一九0七)七月에 靑松客館에서 卒하니 그 生年憲廟辛丑(一八四一)에서 꼽아 享年이 六十七이다.삼가 모셔오자 初同面 斗岩坎坐原에 安葬하니 先塋下이다.嗣子 肯洙는 公에 앞서 歿하고 홀로 子婦鄭氏가 집에 있더니 從姪秉禧를 시켜서 그 族叔和鎭이 엮은 家狀을 갖고와 不侫에게 銘을 請했다.내 老昏하기로 辭讓하여 두번돌렷지만 두번 다시찾아왔다.그 誠懇이 眞摯하니 내어찌 다시避하리오.살피건대 公의 諱는 鍾悳 字는 兌老 初號는 石下인데 晩年에 石荷라 하니 그가 스스로 號한것이다.그 世德인즉 安氏의 先代는 廣州人이니 高麗大將軍邦傑이 始祖이다.中世에 侍御史綏가 비로소 咸安에 居했으며 閤門祗候國柱는 高麗가 亡하자 出仕하지 않았고 生員 崗은 李朝太宗이 여러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으며 侍直淑良은 孝行으로 奏薦되었다.引儀普文이 密陽에 移居한후 司諫覯는 號苔巒인데 佔畢齊門下에서 배웠고 生員餘慶은 學行으로 著聞하니 世稱玉川先生이며 正郞璹은 寒岡門下에서 배워 號가 樂園인데 愚伏先生이 南州의 名節이라 하여 奏薦하였고 東巒 翔漢은 丙子胡亂에 倡義하였으니 모두 들어난 祖先이다.高祖는 景晋 曾祖는 珩重 祖는 孝庠 考는 貞遠인데 모두 隱居不仕하였다.妣交河盧氏는 光健의 따님이요 檜山黃氏는 泳의 따님인데 모두 生育하지 몾했다.本生考는 聞遠 號는 溪广이고 妣眞城李氏는 師淳의 따님으로 退陶後孫이며 驪興閔氏는 良魯의 따님이다.그 才性은 어려서 聰頴하여 겨우 말을 배우자 能히 百餘字를 외우더니 抱卵한 雌雞를  보고 곧 글귀를 만들어 「닭은 새끼치는 功을 받친다(鷄獻作子功)」하니 듣는 이가 竒異히 여겼다.七歲에 痘疾을 앓더니 누어서 佰兄이 賈誼의 疏외우는 것을 듣다가 闕文과 誤字가 있으면 문득 指摘해 말했다.十餘歲에 文詞가 빨리 進就하여 儕類間에 名聲이 있었다.일찌기 月城 여름 講會에 나가 손수 論과 策을 쓰니 筆力과 文翰이 흐르는듯하자 많은 선비가 모여서 보고 혀를 차며 稱道했다.性齊許公이 金海에 出宰 白日場을 열어 鄕飮酒禮를 行하더니 公이 壯元을 차지하자 許公이 사랑하여 곧 約定을 읽어 周旋케 했는데 이로부터 往來하며 講學하고 問質하여 聞見이 더욱 넓었다.이윽고 鄭公海崙을  海營에 陪從하더니碧瀾津을 건너자 詩를 지어「배가 中流의 急所를 지나자 아직 건너지 몾한 사람이 돌려 생각난다(舟過中流急回思未渡人)」하니 보는이가 經濟의 器局으로 惟許했고 글을 읽으면 힘써 旨趣를 究明하니 비록 老師와 宿儒라도 한사람 앞자리를 讓步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그 出仕한 履歷인즉 國學에 오르자 곧 將作郞을 際授하여 해마다 陞薦하니 內職으론 副司果,宣惠郞,均役廳分差,宣惠堂上攝行,禁府都事,掌樂院主簿,秘書丞,中樞院勅任官,이고 外職으론 聞慶,盈德,梁山,大興,興海,蔚山,始興과稷山의 按覈使,全羅道巡察使,靑松郡守였다.그 莅官한 事功인즉 일찌기 別試에서 時事의 對策을 條陳하자 上試官 李應辰이 “安某는 眞正한 經濟의 才局이다”하였고 또 貢物案의 釐正으로 閔相台鎬의 알음을 얻으니 閔公이 매우 器重히 여겼다.한官奴가 權勢를 끼고 斗量을 속이자 痛切히 退斥하여 容貸하지 않았으며 堂上官이 私請으로 法을 굽히려 했지만 直道를 잡아 屈服하지 않았으며 漕運 맏은 吏卒이 옳지 않게 漁物을 饋贈하자 물리쳐 받지 않았으니 그 淸廉潔白이 모두 이러하였다.宣惠堂上을 攝行할때 밤중에 宮變이 일어 御駕가 移動함에 公이 江郊에 步出하여 白米四百石을 搜集하여 各殿의 供用으로 받치자 上이 引見하고 諭示하여“밤이차고 江이 險한데 勞苦가 없던가”했다.일찍이 宮禁을 淸肃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極言한 疏를 特히 優渥한 批答을 받았고 또 科擧의 久癈를 걱정하여 學部에 上書하기를 “科擧의 名稱은 고치지 말고 鄕貢法을 準用하자”하고 또 政府에 帖子를 올려 選士興學하는 規程을 歷論했다.또 同僚 宋鍾德과 함께 上疏하여 尊聖改學하기를 請하니 上이 批答하여 “이 疏論이꼭 朕의 뜻에 맞다”했다 또 疏로서 協約의 誤國함을 論罪하여 그 首魁를 베어 天下萬國에 謝過하기를  請하니 辭氣가 凜凜하여 朝廷大臣이 洒然히 容儀를 바꾸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마침내 萬言疏를 올리니 字字히 忠血이 붉어 足히 天聽을 感動케 했던 것이다.그가 聞慶에 있어선 十條를揭示하여 崇學勸農을 開論하니 郡民이 訟德碑를 세웠고 盈德에 있어선 靑松을 兼治 했는데 疑獄을 立沒하니 사람들이 그 神明에 歎服했다.大興에서는 土豪가 民田을 勤奪한 者가 痛切히 懲治하여 돌려주게하고 隣郡의 積滯된 獄訟을 撤底히 查覈하여 決斷했으니 그 獄事의 分析에 明敏함이 또 이러하였다.興海에 있을때 吏屬이 두려워하고 百姓이 安堵하니 慶尙御史 金思轍이 堵聞하기를 “惠政은 窮民救恤을 먼저하고 錯綜한 獄訟을 듣자 處理한다” 했고 忠淸御史 李重夏는 啓聞하기를 “理財를 잘하여 舊逋를 淸刷하고 奸吏를 剔出하여 隱弊를 살핀다”했다.蔚山에 있을때 큰 凶年이 들자 祿俸을 出損하여 衆民을 救濟하니 維新의 功積이 있었건만 마침 免官되자 浩然히 돌아와 그 居室에 扁額하기를 『常足』이라 했으니 대게 足함을 안다라는 뜻이다.庭前에 向日花가 있어 風雨에 쓸어지면서도 花頭는 그대로 向日하니 公이 贊을 지어 感懷를 말했다.始興,稷山의 按覈使로서는 政事를 公明하게 다루었기로 二郡이 힘입어 安堵했고 全羅監營에 있어선 먼저 觀察使를 彈劾하여 그 貪婪한 罪를 懲治하고 이내 列郡을 巡察하여 良識없는 者를 들어 내치니 騘馬의 風氣가 있어 一道가 肃然했다.일찌기 大丘監營의 讌會에서 監司가 모든 守令에게 削髮하도록 말하자 公은 홀로 앞장서서 抗言하기를 “削髮하여 장차 무엇 할것이오”하니 監司가 부끄러워 했다.靑松에 나감은 左遷이지만  辤職않고 就任한것은 장차 山水의 趣味를 누리고자 함 이었는데 到任한지 얼마않아 仙駕를 催促했으니 哀惜하기 그지없다.그 平常 行檢인즉 어릴적부터 兩親에게 承順하여 잠시도 잊지 몾하더니 榮宦에 오르자 매양 三釜로도 奉養몾함을 痛恨했고 祭日을 만나면 哀哀히 孺子처럼 울어 늙도록 變하지 않았다.兄弟와 더불어 友愛가 隆摯했으니 捧祿의 餘財를 兄의 庫房에 儲置하여 그 用度를 묻지 않았으며 土地의 肥沃한 것을 가려서 宗侄에게 주었고 族親의 貧窮한 者는 極力으로 賙給했다.衙門을 활짝 열어 親舊를 接應하니 무릇 遠近에서 지나는 者가 저자처럼 모여 들었다.族人中에 染疾한 者가 있었는데 몸소 藥餌를 調製하여 그 죽음을 救濟하니 남들이 모두 어려운 일이라 했다.文章은 가욋일이나 學識이 瞻冨함에 물 흐르듯 應用했으니 일찌기 宗廟社稷의 告由文을 지었고 또 石鼓閣의 樑頌을 지었다.또 特命으로 垂簾한 內朝의 諺文敎書 數十券을 漢文으로 膡出하였으니 무릇 한時代의 詞命이 많이 公의 손에서 나왔다.配貞夫人龍城宋氏는 鎭鳳의 따님인데 戊申(一八三八)에 나서 癸未(一八八三)에 卒하고 金浦後山卯坐原에 安葬했다.從子로서 後嗣를 삼으니 바로 進士肯洙인데 烏川鄭氏에게 장가드니 곧 鄭夫人이다.至誠으로 섬기고 奉養하여 追慕의 마음이 哀하지 않았다.三女는 孫永億,孫永弼 宋世永이고 三南은 秉奎,秉均,秉鎬인데 秉奎가 방금 童蒙으로 居衰하고 있다한다.嗚呼라 公은 內修하여 行誼가 篤至하고 事君하여 忠直이 表表하니 이것이 실로 써야할일이다.또 公은 벼슬이 二品에 올랐으니 마땅히 銘이 있을것이다.이에 銘하노니, 거룩하다 安氏는 廣陵의 華胄라 玉川의 薪火와 樂園의 箕裘로서 变变하고 绳绳하니 南州의 聲望일세 여기서 公이  나니 天姿가 類例없어 才操는 倚馬를 쫓고 文章은 騰蛟에 비겨 이내 國學에 놀다가 바로 淸要에 올랐구나.아침에 際授하고 저녁에 陞遷하니 東班에서 印綬차고 西班에서 兵符찿네.入朝하여 盡忠하니 朝陽의 鳳雊로다.莅民하여 剔奸하니 下縣에 雉乳하듯 이에 詞垣에 오르고 이에 樞府를 管掌했네.名聲은 實德과 함께 높고 爵位는 年歯와 같이 높았네 靑松에서 白鶴처럼 優遊하려하더니 浩然히 歸息하니 斗岩이 幽幽하다 貞珉에 琢銘하여 后世에 남기노라.

 

 

                        前禁府都事   聞韶      金  道  和    撰

 

 

▶위치:경남 밀양시 초동면 금포리 두암동

 

 

 

 

 

 

대한제국 연표 1904년(광무8년) 갑진년

 

  1월:헌종계비 명헌태후 홍씨 죽음

  2월:일본육군 인천에 상륙,러시아 공사 철수,한일 의정서 성립,상무사 폐지

  3월:장호익 등 황제페위를 음모하다가 처형됨,일본특파대사 이토오 히로부미 내한,용암포를 개항

  4월:경운궁에 화재,지계아문을 폐하고 양지국을 둠

  5월:한로조약 폐기

  8월:제1차 한일협약 성립,송병준,윤시병 등 유신회 조직,이용구 진보회 조직,유신회와 진보회가 합하여 일진회로 개칭

 10월: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입경

 11월:공진회 발족 전환국 폐지

 12월:미국인 스티븐스,외부 고문에 임명,경부철도 준공,런던 데일리 뉴스의 특파기자 베델 입국

 

 

全羅南道巡察使廣州安公墓碣銘[幷序]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찬

近故嘉善大夫、全南巡察使石下安公、以歲丁未之秋七月卒于(주1)靑之客館、距其生憲廟辛丑、享年六十七。旣愼歸、將葬于上西斗巖負坎之原、從先兆也。嗣子肯洙先公殀。獨子婦鄭氏在室、使從姪秉禧持其族叔和鎭狀乞銘於不佞、余以耄荒固辭、其懇甚摯、余又何忍辭。按:公諱鍾悳、字兌老、石下其自號也。其世德則安氏之先出自廣州、高麗大將軍邦傑爲初祖。中世有侍御史諱綏、始居咸安。有閤門祗侯、諱國柱、麗亡不仕。有進士諱崗、我太宗朝屢徵不就。有侍直諱叔良、以孝行薦。有引儀諱普文、移居密陽。有司諫諱覯、號苔巒、學于佔畢之門。有生員諱餘慶、以學行著世、稱玉川先生。有正郞、諱璹、學于寒岡之門、號樂園。愚伏先生以南州名節薦。有東巒諱翔漢、丙亂倡義、皆聞祖也。高祖曰景晉。曾祖曰珩重。祖曰孝庠考曰貞遠。俱伏不仩。妣交河盧氏光健女。檜山黃氏泳女。皆不育。本生考曰聞遠、號溪广。妣眞城李氏師淳女、退陶之後、驪興閔氏良魯女也。其才性則幼而聰穎、甫學語能誦百餘字、見雌鷄抱卵卽屬句曰:鷄獻作子功。聞者異之。七歲嬰痘疾。臥聞伯兄誦賈誼疏有闕誤、則輒指言之。十餘歲文詞驟進、有聲儔類間嘗赴月城夏課、手書論策、筆翰如流、多士環堵嘖嘖。及性齋許公宰金官也、設白場行酒禮、公居魁。許公愛之。仍使讀約周旋、自是往來講質、聞見益廣。旣而從鄭公海崘于海營渡碧瀾津。有詩曰:舟過中流急、回思未渡人。見者以經濟之器許之。讀書務究旨趣、雖老師宿儒莫不讓與一頭地矣。其出仕履歷則自陞國庠卽除將作郞、年除歲遷內則副司果也、宣惠郞也、均廳分差也、宣惠堂上攝行也、禁府都事也、樂院主簿也、秘書丞也、中樞勅任官也。外聞則慶也、盈德也、梁山也、大興也、興海也、蔚山也。始興稷山按覈使也、全羅道巡察使也、靑松郡守也。其莅官事功則嘗於別試條陳時事、策上試李應辰曰:安某眞經濟才也。又以貢案釐正見知於閔相台、鎬閔公甚器之廳隷有挾勢濫斛者、痛斥不貸。堂上有私屬枉法者、秉直不撓。漕卒有非義饋魚者、斥退而不受。其廉潔多此類、當惠堂攝行時宮變夜起、廈氈移動、公步出江郊搜納四百石米爲各殿供。上面諭曰:夜寒江險得無勞乎。嘗以肅淸宮禁之意上疏極言、特蒙優批。又以科擧久廢之患上書學部
曰:不改科擧之名、而用寓鄕貢之法。又上政府帖、歷論選士興學之規。又與同僚宋鍾億等上疏請尊聖改學。上批曰:今疏陳政合朕意。又疏論協約誤國之罪、請斬其首以謝天下萬國。辭氣凜凜、朝廷莫不灑然易容。末乃上萬言疏、字字忠赤、有足以感動天聽者矣。其在聞喜十條揭諭崇學勸農、民有頌德碑。在盈德兼理松郡、立斷疑獄、人服其神明。在大興土豪之勒奪民田者、痛懲而還之。隣郡之獄訟積滯者、窮査而決之。其明於折獄又如此。在興海、吏畏民安。直指金思轍啓曰:惠先恤窮、聽理綜覈。李重夏啓曰:運算而刷舊、逋剔奸而察隱瘼。在蔚山歲値大無、捐俸金而濟衆、有維新之績。適被免官、浩然而歸顔其所居曰:常足。蓋取知足之意也。庭前有向日花爲風雨所倒而頭尙指日、公作贊而寓感、爲興稷按覈使也。按事公明二郡賴而安堵、在全營先劾觀察使以懲其貪婪之罪、因巡行列郡擧其無良者黜之、有驄馬之風、一省肅然。嘗於達營讌會臬司、令諸倅剃髮。公抗言而前曰:剃髮將何爲也。臬司有慚色。至靑松則出於左遷而不辭就職、將以敍山水之趣也。下車未幾、仙馭遽促。惜哉。其庸行則自幼承順兩親、跬步不忘。及登榮道、每有三釜之慟、遇喪餘哀、哀孺子哭至老不衰、與兄弟友于隆摯、廩俸餘財儲之兄庫、不問其出入。擇土壤之腴者付與宗姪。族親病貧者、極力周給。洞開衙門、日接朋舊、凡遠近行過者如歸。市有族人染疾者、躬調藥餌以救其死、人皆以爲難。文章餘事耳、蓄積旣富、應用如流。嘗製宗廟社稷告由文、又製石鼓閣六偉頌、又以特命取垂簾朝諺書數十卷、眞書謄出。凡一時詞命多出於公手。配龍城宋氏鎭鳳女。生戊申、卒癸未、葬于星萬靑龍子坐原。取從子爲嗣、卽肯洙進士。娶烏川鄭氏、卽鄭夫人也。至誠事養、追慕不衰也。三女孫永億。孫永弼。宋世永。進士三男。秉奎。秉均。秉鎬。皆幼。秉奎方持衰云。嗚呼。公之所以修於內者、行誼篤至。出而移於君者、忠直表表、是固可書也。且公位躋二品、法宜有銘。於是乎。銘。銘曰: 於惟安氏、廣陵華胄。玉川薪火、樂園箕裘。奕奕繩繩、有聲南州。公則是生、天姿寡儔。才追倚馬、文擬騰蛟。乃遊庠學、乃躋淸要。朝除暮遷、東紱西符。立朝盡忠、朝陽鳳雊。莅民剔姦、下縣雉乳。乃登詞垣、乃管樞府、名與實隆、位與年邵。靑松白鶴、聊以優游。浩然歸息、斗巖幽幽。琢之貞珉、以貽來后。
    

     前禁府都事   聞韶      金  道  和    撰

 

(주1)고려초에는 鳧伊로 불리다가 靑鳧는 고려 성종조에 불렀으며 靑松의 古號이며 靑松이란 지명은 조선 세종때 개칭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