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氏의 옛터에 세워진 司諫亭 碑
대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물에 대해서는 사모하는 마음이 시대가 멀면 멀수록 더욱더 절실한 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설사 그저 평범하게 노닐던 곳이거나 아니면 한때 쉬어 간 곳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반드시 이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면서 머뭇거리며 차마 그 곳을 쉽게 떠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그것이 진작에 심어서 가꾼 정자나무인 경우이겠으며, 일찍이 파서 길어 먹던 샘물의 경우이겠으며, 또 일찍이 거처하며 생활하던 정사(亭舍)의 남은 터전일 경우이겠는가.
고려 때 시어사(侍御史)를 지낸 안공(安公) 휘 수(綏)가 옛날에 정자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정자는 함안(咸安)의 안인촌(安仁村)에 있다. 공은 본래 광주(廣州)에 살았는데 이사하여 이 곳에 터전을 마련하고는 정자를 짓고 나무를 심었으며, 해마다 날씨가 더운 여름이 되면 이 곳에 올라와 사방을 조망하면서 스스로 자적(自適)하였다. 공은 일찍이 이 영남 지방을 안절(按節)한 일이 있는데, 그 때 훌륭한 치적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여 이 정자의 이름을 ‘어사정(御史亭)’이라고 하였다.
그 뒤 공의 아들 관찰공(觀察公) 지(祉)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조정에 벼슬하여 현달(顯達)하였는데, 어느 날 용감히 산림(山林)으로 물러나서 생도(生徒)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 정자 옆에 우물을 팠는데 그 물맛이 달고 시원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또한 이 우물을 사랑하여 이름을 ‘관찰정(觀察井)’이라고 하였다.
관찰공의 아들은 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를 지낸 수(壽)인데, 그 또한 문장으로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런데 어사공이 심었던 나무가 이미 세월이 오래 되어서 늙어 모지라지고 말았으므로, 공이 다시 정자의 동쪽에 나무를 새로 심고는 정자의 이름을 ‘만세정(萬歲亭)’이라 하였다. 대저 이는 그 수명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던 것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 이 정자를 ‘사간정(司諫亭)’이라고 고쳐서 불렀다.
이에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하였다. 그리하여 상하 7, 8대에 걸쳐서 대대로 장덕(長德)과 거인(鉅人)들이 이 가문에서 나와서 실로 안인(安仁)의 촌주(村主)가 되었으므로, 원근의 사람들이 다들 이 곳에 사간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사간공으로부터 6대를 전하여 참봉 보문(普文)에 이르러 마침내 밀양(密陽)으로 이사를 하게 됨으로 해서 이 정자는 자연 황폐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 옛 나무만은 홀로 우뚝하게 울창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리하여 그 뒤 7, 8백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 마을의 부로(父老)들은 이 곳을 가리키면서이 나무를 사랑하였다.
그런데 왕년에 어떤 무수(武帥 무장(武將))가 이 나무를 베어서 재목으로 쓰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힘껏 다툰 결과 이를 그대로 보전할 수가 있었다. 그런 뒤 다시 공의 여러 후손되는 자들과 상의해서 그 남아 있는 터에 비석을 깎아 세움으로써 이에 대한 표지(標識)를 하기로 하였다.
지금 추밀원 의관(樞密院議官)으로 있는 안공 종덕(安公鍾悳) 씨와 전임 무산 군수(茂山郡守)를 지낸 안군 태원(安君泰遠)이 편지를 보내어서 나에게 그에 대한 비문을 부탁하여 왔다. 내가 비록 글솜씨가 없기는 하지만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겠기에, 기꺼이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나라의 사대부(士大夫) 가문 중에 글과 학문으로 가문을 일으켜서 세대를 전한 것이 오래 되고 풍류가 넓고 길어서 그 남은 운치가 끝나지 않은 경우로 말한다면, 오직 광주(廣州)의 안씨(安氏) 가문이 가장 으뜸이라고 하겠다. 지금 이 가문의 근고(近古)의 인물에 대하여 한번 말해 본다면 옥천(玉川 안여경(安餘慶))이나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과 같은 여러 선생들이 특히 저명한 분들이며, 그 이외에도 숨어 살면서 고을에 가르침을 베풀거나 벼슬을 해서 백성들에게 은택을 드리움으로써 우뚝히 한 시대의 추복(推服)을 받는 자들로 말하면 자못 그 수가 수두룩하게 연이어져서 이를 새삼 일일이 세어 볼 수조차도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찌 그럴 만한 연유가 없이 가능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가지가 무성한 나무는 뿌리가 반드시 튼튼하고, 흐름이 긴 강물은 근원이 필연코 깊은 법이다. 따라서 이것은 저 어사공이나 사간공이 심어서 가꾼 나무와 관찰공이 파서 친 우물을 두고 본다면 가히 징험할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일찍이 이와 같이 기거(起居)하고 생활하던 그 정사(亭舍)의 터전이 이처럼 남아 있는데도 또한 지금 이 곳에 아무런 표지를 남기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른바 바라보면서 회상하고 돌아보면서 그리워하는 바가 또 어찌 단지 저 나무나 우물에 대해서만 그치고 말 뿐이겠는가. 요컨대 심어서 가꾼 나무나 파서 친 우물에는 더욱더 큰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 서로 권면해서 길이 변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면, 지금 이 남은 터전에 빗돌을 깎아 세워서 표지를 남기는 일 또한 그것을 이어서 지켜 가도록 하는 도리[嗣守之道]에 도움되는 바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말로써 저 안씨의 후손들에게 일러 주고자 하는 바이다.
안인(安仁)은 옛 이름이 안니(安尼)였다. 그런데 한강 선생(寒岡先生 정구(鄭逑))이 이 고을에 고을살이를 나왔을 때에 ‘니(尼)’를 고쳐서 ‘인(仁)’으로 바꾸었던 것이니, 이처럼 대현(大賢)이 그 이름을 고친 취지가 어찌 또 우연한 것이었겠는가. 이 점도 같이 기록하여 두는 바이다.
안여경(安餘慶)
1538(중종 33)∼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선계(善繼), 호는 옥천(玉川).
아버지는 하양훈도(河陽訓導) 응운(應雲)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경원판관 세복(世福)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중용》·《대학》·《심경》·《예기》 등의 글을 읽어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1580년에 정구(鄭逑)가 창녕군수가 되어 학교를 크게 진흥하여 여덟 채의 서당을 세웠는데, 그 첫째인 물계서당(勿溪書堂)에 안여경으로 강장(講長)을 삼았다.
또, 김우옹(金宇顒)이 이조판서가 되어 그를 추천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옥천산(玉川山)에 들어가서 정사를 짓고 스스로 옥천주인이라 불렀다. 그
의 저서는 많았으나 임진·병자란 때 불타서 없어지고, 《옥천유고》 단권만이 남아 있다. 창녕의 관산사원(冠山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안종덕 (安鍾悳) : 1841년(헌종 7)~1907년(순종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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