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玉川公 諱餘慶墓誌銘幷序(26世諱餘慶)

쉬어가는 여유 2017. 9. 26. 14:39

公諱餘慶字善繼其先廣州人曾祖諱覯事 中宗大王官至司諫院司諫號苔巒受業于佔畢齋先生王父諱峋忠順衛副司猛娶昌寧姓軼之女仍居池浦村考諱應雲河陽訓導妣陽城李氏慶源判官諱世福之女嘉靖戊戌四月公生公天質朴實不爲文飾愼思明辨不拘世務歲癸丑公年十六徃省益陽外王母因病未還適軍籍講官到縣以呼不降丁長老見而勸之曰以子之年少才質寧有是役也呈文請改講未或不可公曰國法如此爲士者但當修已自勉而已豈可請託圖免竟不聽物論偉之公早喪慈恃年二十二又遭外艱日夜號泣歠粥三年事庶母無異所生鄕里歎服公與友人李仁悌同里閈作書堂於前溪上以爲藏修之所相與讀書講磨自强不息隆慶庚午中司馬成牛溪見公氣質不凡操守甚篤歎曰二百榜中豈無眞儒也公居家每鷄鳴而起衣帶必飭平明入謁家廟而退常讀庸學心經禮記等書以爲修己治人之本奉祭祀以禮待人物以信聞人喪葬必先到後罷見人疾病必劑藥救護其誠意藹然有足以孚於人公與東岡金宇顒寒岡鄭述大菴朴惺存齋郭竣松庵金沔禮谷郭趄謹齋李慶弘諸賢爲道義之交更相來徃講問質疑萬曆庚辰寒岡先生宰昌寧以興學校爲政作八里書堂其一勿溪也以公爲師公與成天祚黃彦寶成安義盧克弘諸人率鄕中子弟每月朔望通讀講禮又鄕人之善者揚而學之其不善者絶而不與必待改過然後方許及門以故善者慕之而不善者亦不至深怨也東岡先生爲吏部時擬薦公爲一官公笑而不肯入玉川山中卜築精舍自號玉川主人挾冊遊學者常十數堂下有道卽淵寒岡先生改名道自淵遂題詩壁上曰道自淵上有亭數間窓含活水欄挹蒼巒手執朱學頭戴程冠其人如玉吾友是安又甞望玉川後峰揷在半空馬上揖之曰如對主人氣像其奬詡之中至如此公輿寒岡大庵裒粹經禮俗禮之可行者商確質正而記之名曰問答解義好禮者見而傳習壬辰正月四日病卒于玉川亭享年五十五時邊聲日急未得備禮四月丁西權葬於涉池先隴之側坤向之原配密陽朴氏將仕郞洋之女癸巳二月十二日歿于沙池寓舍附葬公墓下公無子側室只有一女以再從兄子璹爲嗣今本道都事也鳴呼㺬以不才出入門下十有餘年幸蒙提撕捚辯之己免恩同昊天義當築室而鯨賊陸梁葬不以禮亦未得會哭終天之痛可勝言哉今者都事改封塋墓屬余誌之余於都事且舍兄也豈敢以文拙辭遂爲之銘曰

天生碩人玉質金精諫院之孫陽城之甥心存經禮學慕朱程懷寶深藏半世居貞玉川之東更築小亭峰巒騰彩猿鶴堅盟遠方朋來一時俊英風乎詠歸五六冠纓不厭不倦道脈斯享豈意早年起起夢驚不泯者德不朽者名禮有鮮義功在後生於戱夫子流芳萬齡


萬曆四十五年丁巳冬十月  日(西紀一六一七年)

門人再從姪奉正大夫守軍器寺副正安㺬謹撰





주)廣州安氏遺史誌232~235페이지


본관은 광주(). 자는 선계(). 호는 옥천(). 아버지는 하양훈도() 응운()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로 경원판관 이세복()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중용』·『대학』·『심경』·『예기』 등의 글을 읽어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1580년에 정구()가 창녕군수가 되어 학교를 크게 진흥하여 여덟 채의 서당을 세웠는데, 그 첫째인 물계서당()에 안여경으로 강장()을 삼았다. 또, 김우옹()이 이조판서가 되어 그를 추천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옥천산()에 들어가서 정사를 짓고 스스로 옥천주인이라 불렀다.

그의 저서는 많았으나 임진·병자란 때 불타서 없어지고, 『옥천유고』 단권만이 남아 있다. 창녕의 관산서원() 별사()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