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玉川先生廣州安公諱餘慶行狀(26世 諱餘慶)

쉬어가는 여유 2020. 1. 17. 11:30

先生諱餘慶字善繼廣州人上祖諱邦傑佐麗祖拜大將軍至侍御史諱綏移嶺之咸安郡世有聞人至諱國柱官中郞將麗亡不仕其子罔亦以麗朝進士號騎牛子遯跡農畝世高其節生諱叔良成均進士世宗朝以孝行擢拜翊衛司侍直生諱普文徵賢良不就移居密陽之金浦曾祖諱覯我 中廟朝官司諫號笞巒從佔畢齋先生學大父諱峋忠順衛副司猛娶昌寧成軼女仍居昌之池浦村考諱應雲河陽訓導妣陽城李氏判官諱世福女以嘉靖戊戌四月日生公公天姿樸實不修邊幅長又嗜學耐辛究索不得不措年十六嘗應軍籍講以牲劣編丁役公不爲動長老勸之曰以子之才寧有是也呈文改講未爲不可公曰國法如此爲士者只當反求諸己暫時榮辱何足介也物論韙之早喪母年二十二又遭外艱哭泣居喪勤遵禮法事庶母無間所生鄕里稱之與同閈友李上舍仁悌築書室於溪上講磨不息  隆慶庚午陞上庠成牛溪一見便推詡有時曰君看江左眞儒否二百榜中第一人居家聽鷄而起衣帶必筋平明謁家廟退而讀庸學心經禮記等書蓋不但讀了死喪必欲見之於行閨庭之間恩義兼盡奉先以禮接人以誠赴人死喪必先徃後罷人有疾病必劑藥救護忠厚信善藹然盈缶故人亦無間言與金東罔鄭寒罔朴大菴郭存齋金松庵郭禮谷李謹齎諸賢交遊日廣問學日高萬曆庚辰寒岡先生出宰昌寧大興學校以先生掌勿溪塾公與成天福成天祚黃彦寶成安義盧克弘諸公分敎八里生從每月朔通讀講禮視賢否而入斥之而故善者慕之不善者亦不至深怨也東岡先生爲吏部時擬薦公不肯乃止入玉川山中築精舍字號玉川子挾冊從遊者甚衆堂下有道卽淵寒岡先生改卽以自遂題詩曰道自淵上有亭數間窓含活水欄挹蒼巒手埶朱學頭戴程冠其人如玉吾友是安又嘗望玉川後峰出半空馬上揖之曰如對梅隱先生初號氣像李畏齋從後問之曰梅隱氣像若是亭亭乎先生曰殆庶幾乎嘗見公朝霧詩一絶歎曰此老不但深於禮學又有經濟之才其奬詡之重如此嘗與寒岡大庵裒拈經禮俗禮取其宜於今而不倍於古者商確講定而記之寒岡目之曰禮經要語先生遺集散佚於兵燹而獨此一篇得全云壬辰正月四日考終于玉川亭享年五十五四月丁酉葬于沙浦先隴之側坐艮原配密城朴氏將仕郞洋之女癸巳二月十二日歿祔葬于墓下公無子有側室女一人嗣子璹行本道都事娶玄風郭氏參奉再祉之女孫男六人盛漢翔漢(丙子倡義)彰漢良漢桭漢雯漢曾孫若于人時進生員時退生員玄孫以下繁不錄工始與鄭寒岡李琴軒長坤姜進士昕聯享于昌之冠山祠及寒崗先生 賜額後公與姜公奉享于別祠鳴呼語曰剛毅木訥近仁又曰魯無君子者斯焉取斯先生以朴實之村加篤勵之工又與一時諸賢麗澤而磨礱之雖無名位之盛承授之的而昌之人士至今稱慕之實行之不可誣有如是夫公之後孫彦邦前府使鍾悳斯文彦淳將印公遺集彦淳氏以書來屬不佞以狀行藐玆後生何敢當是役重遠來命且以托名卷端爲榮遂撮其大槩如右

今  上三十四年歲在丁酉後學全義李種杞謹撰


▲所在地:창녕군 대합면 주매리 (옥천공 할아버지 위의 墓는 훈도공 諱 應雲이며 맨위 우측은 副司猛公派인 諱 峋公의 墓다

(上三十四年은 1901년)

※行狀은 諡號 碑銘 墓誌銘 作成의 土臺가 되는 것으로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行跡을 記錄한 것이다.

이 行狀은 草野에 묻혀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정진하신 玉川公의 後學인 號 茶園居士 李種杞가 撰하였다.


○生歿年:1538(중종 33)∼1592(선조 25)

玉川先生은 나의 14代 祖父로서 本貫은 광주(廣州). 字는 선계(善繼). 號는 옥천(玉川). 父는 하양훈도(河陽訓導) 응운(應雲)이며, 母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경원판관 이세복(李世福)의 딸이다.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은거하였다. 『중용』·『대학』·『심경』·『예기』 등의 글을 읽어 자기를 닦고 남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다.
1580년에 정구(鄭逑)가 창녕군수가 되어 학교를 크게 진흥하여 여덟 채의 서당을 세웠는데, 그 첫째인 물계서당(勿溪書堂)에 안여경으로 강장(講長)을 삼았다. 또, 김우옹(金宇顒)이 吏曹判書가 되어 그를 追薦하였으나 應하지 않고, 옥천산(玉川山)에 들어가서 정사를 짓고 스스로 玉川主人이라 불렀다.
그의 著書는 많았으나 임진·병자란 때 불타서 없어지고, 『옥천유고』 단권만이 남아 있다. 昌寧관산서원(冠山書院) 별사(別祠)에 祭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