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同面(초동면)
금포리(金浦里)
멀리 덕대산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 있고, 그 산의 한 줄기가 남으로 내려와 성만리 뒤산에 이른다. 다시 산세가 동으로 뻗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성만리 뒷산에서 한 줄기가 나즈막하게 남쪽으로 내려와 금포리 뒷산에 이른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 금포리(金浦里), 서쪽에 속하, 서남쪽에 두암리(斗岩里), 동북쪽에 시리골,기와골 등이 있다. 이 마을은 옛 수산현(守山縣)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사방으로 틔여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검암리(儉岩里)와 성만리(星萬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금포리(金浦里)라는 법정리를 이루었다. 지금은 금포, 속하(소캐), 시리골, 기와골, 두암리, 모래들 등 6개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리는 금포(金浦), 두암(斗岩)으로 나눈다. 동으로는 하남읍 귀명리, 서로는 검암리, 북으로는 성만리와 각각 인접해 있고, 남으로는 옛 수산제(守山堤)를 사이에 두고 하남읍 수산리와 경계를 이룬다. 유적으로는 鰲山(자라목)이 있고, 또 패총(貝塚) 유적과 두암리 고분군 등이 있다.
(1) 금포리(金浦里)
금포리의 본동이다. 옛날에는 수산제(守山堤)의 가장자리에 있었는데, 수산제가 개발되기 전에는 마을 앞까지 늪지대가 되어 많은 연밭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이 연꽃이 만발하면 금빛 찬란한 포구(浦口)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한다. 수산제가 1913년부터 개발되면서 지금은 다 들이 되었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금포(金浦)이다. 일찍부터 광주안씨(廣州安氏) 일파가 입촌한 후 지금까지 세거해오고 있다. 재사(齋舍)로는 광주안씨(廣州安氏) 일문의 재숙소(齋宿所)인 임연재(臨淵齋)와 오휴자(五休子) 안공이 만년에 장구소(杖구所)로 건립한 오휴정(五休亭) 등이 보존되고 있다. 이외에 안언장(安彦章)의 정사(精舍)인 소강정(小岡亭)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 배암골(蛇谷)
금포리 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산세가 뱀을 닮았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 갈밭굼
시장골 남쪽 자라목 위에 있는 들이다. 이곳은 지형이 낮고 푹 꺼져 있으며, 옛날에는 갈대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다 개발되어 논이 되었다.
■ 갈밭굼고개
금포리에서 시장골을 거쳐 갈밭굼으로 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금포리 마을 앞에 있는 沼 때문에 이곳으로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길이 없어지고 지명만 남아 있다.
■ 시장골
흰산모롱이와 갈밭굼 사이에 있는 들이다.
■ 시장골고개
금포리에서 시장골로 가는 고개이다.
■ 흰산(白山)
금포리 동남쪽에 있는 산이다. 이곳은 늘 그늘이 져서 땅이 얼고 부풀어서 희게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흰산모랭이
금포리에서 하남읍 수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모롱이이다.
■ 금포앞들
금포리 마을 앞에 있는 들이다. 옛날 이곳은 늪지대였으며, 연밭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다 개발되어 들이 되었다.
■ 머정날
금포리에서 시리골로 돌아 가는 길목에 있는 모롱이이다. 옛날 이곳에 모정(茅亭)이 있었다고 전한다.
■ 성만고개(星萬峴)
금포리에서 성만리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마을 뒤에 위치하고 있다.
■ 속하고개(涑河峴, 소캐고개)
금포리에서 속하로 가는 고개로서 일명 소캐고개라고 부른다.
■ 딧갓
금포리 마을 뒤에 있는 산이다. 마을 뒤에 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2) 속하(涑河,소캐)
금포리(金浦里)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행정적으로는 금포리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은 옛 수산제가 개발되기 전에는 홍수가 지면, 물이 마을 앞까지 갇힌다고 하여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일명 소캐라고 한다. 1470년 경에 인의(引儀) 안보문(安普文)이 함안군 대리(大里)에서 이곳으로 이거(移居)하여 광주안씨(廣州安氏)의 전거지(奠居地)가 되었다고 한다. 재사(齋舍)로는 안언무(安彦繆)의 장수소(藏修所)인 식호당(式好堂)이 보존되고 있다.
(3) 시리골(甑谷, 悉谷)
금포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행정적으로는 금포(金浦)에 속해 있다. 이 마을의 주변 산세가 마치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황새등
시리골과 기와골 사이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산세가 마치 황새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일명 학등(鶴嶝)이라고 한다.
(4) 기와골(臥谷,재왓골)
금포리(金浦里)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성만리(星萬里)와 경계를 이룬다. 행정적으로는 금포리(金浦里)에 속해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기와를 구웠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일명 잿와골이라고 한다.
(5) 두암(斗岩, 豆岩)
금포리(金浦里)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소두암과 함께 두암리를 형성했는데, 지금은 소두암은 없어지고 지명만 남아 있다.
■ 새갓
두암 동쪽에 있는 산이다.
■ 무등대
두암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로서 자라목까지 내려와 있다. 이곳은 등이 넓고 평평하게 내려 왔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두암고개(豆岩峴, 斗岩峴)
금포리에서 두암리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6) 모래들(沙野洞)
두암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행정적으로 두암리에 속해 있다. 옛날 수산제가 개발되기 전에는 홍수가 지면, 낙동강이 범람하여 강변의 모래가 이곳으로 많이 밀려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며, 또 마을 앞에 있는 들도 모래들이라고 한다.
■ 자라목(鰲山)
하남읍 수산리에서 금포리(金浦里)로 가는 길목 산기슭에 있다. 모래들 마을 뒤산에서 동쪽으로 볼록하게 나와 있는 나즈막한 산(山)으로서 마치 자라목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신라 시대에 신라왕(新羅王)이 이궁(離宮)해와서 수산제(守山堤)에서 배놀이를 하다가 이곳에서 머물던 곳이었다고 하고, 또 고려 시대에 김방경(金方慶)이 여(麗).원연합군(元聯合軍)과 함께 일본을 원정하기 위해 이곳에서 진을 치고, 군수를 마련했다고 전한다.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에는 오산조대(鰲山釣臺)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는 낚시터로 이용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또 이곳에는 패총의 유적도 많이 남아 있다. 비록 그 원형은 많이 파손되었으나,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도 신라왕(新羅王)이 이궁해 와서 남긴 유적지로 생각된다.
[출처] 밀양 문화원
금포리 두암 모습 분수 뒤로 고조부 先塋에는 고조부 이하 父親의 산소가 잇다 저수지 옆 회관뒤의 집이 나의 고향집이다 |
(1) 성만리(星萬里, 성만리-星巒里, 석만리-石巒里)
성만리의 본동이며 서편이와 두 땀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편이는 지금 마을이 없어졌다. 옛 이름은 석만(石巒)이다. 밀주지(密州誌)에는 공문충(孔文沖), 공인기(孔麟起), 공숭(孔崇), 변식덕(卞息德), 정유(鄭宥), 배상경(裵尙絅) 등이 소거(所居)했다고 하나, 그 사적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조선 인종 연간에 광주안씨(廣州安氏) 일파가 입촌(入村)하여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재사(齋舍)로는 부사맹(副司猛) 안(安)순이 은거(隱居), 자수(自修)하고 그 子侄의 교육을 위해 창건한 취성재(聚星齋)가 보존되고 있다. 이외에 냉와(冷窩) 안경점(安景漸)의 장수소(藏修所)인 취변재(聚辨齋)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성만리에 있는 聚星齊
○ 서편이
성만리의 서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지금은 없어졌다. 이곳에 마을이 있었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도 기와 조각, 주춧돌 등이 많이 남아 있다.
○ 큰안골
성만리 마을 뒤에 있는 큰 골짜기이다. 이곳에 큰안골고개가 있다.
○ 큰안골만딩이
큰안골 바로 위쪽 정상부에 있는 능선이다.
○ 큰안골고개(뒷고개)
성만리에서 하남읍 남전리 보담으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마을 뒤로 해서 넘어 간다고 해서 뒷고개라고도 한다.
○ 어언안골
큰안골고개(뒷고개)의 동북쪽 언덕받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 밤밭등
성만리와 금포리 기와골 사이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곳에는 밤밭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약새미(약샘)
밤밭등의 아래쪽 끝에 있는 샘이다. 이 샘은 겨울에는 물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차갑다고 한다.
○ 청룡등(靑龍嶝)
성만리 서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곳은 서편이에서 보면 동쪽에 해당된다. 일명 청지등이라고 한다.
○ 작은안골
큰안골의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 큰웅덩이
성만리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웅덩이이다.
○ 당산(堂山)
성만리 동남쪽에 있는 산이다. 이곳에 당집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 땅앞
당산 앞에 있는 산이다. 이곳은 금포리와 경계를 이룬다. 당산 앞에 있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 칠성바우
성만리 마을 앞에서 부터 금포쪽으로 7기의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바위의 위치가 북두칠성같이 놓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바위도 바로 지석묘이다. 현재는 다 매몰되었고, 지명만 남아 있다.
(2) 외성만(外星萬)
성만리의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행정적으로 성만리에 속해 있다. 성만리의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외성만(外星萬) 혹은 바깥성만이라고도 한다.
(3) 통바우(桶岩)
성만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행정적으로는 성만리에 속해 있다. 이 마을 뒤산에 통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통바우라고 하고, 산을 통바우산(桶岩山)이라고 한다. 그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그대로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 건한들
통바우 마을의 동쪽에 있는 들이다. 이곳은 아주 건조해서 메추리 두 마리가 날아오면 한 마리는 굶어 죽는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에는 수확을 할 수 없는 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성만저수지가 축조되어 농사짓기가 좋아졌다고 한다. 이 들에 지석묘 3기가 있었으나, 1988년 경지 정리를 할 때 다 매몰되었다.
(4) 대구령(大龜齡, 大龜淵, 大歸令)
통바우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 앞에 있는 통암산(桶岩山)의 형상이 마치 큰 거북을 닮았다고 하여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옛 이름은 구령리(龜齡里)였다. 지금은 대구령동과 소구령동으로 나누어졌다. 조선 성종 때 죽계(竹溪) 김준(金準)이 경북 상주군 판곡에서 이곳으로 이거(移居)한 후 지금까지 청도김씨(淸道金氏) 일파가 세거해 오고 있다. 또 영조 때에 증동몽교관(贈童蒙敎官) 우경(禹瓊)이 함양군(咸陽郡) 백진(百進)에서 이곳으로 이거(移居)한 후 지금까지 단양우씨(丹陽禹氏) 일파도 세거해 오고 있다. 재사(齋舍)로는 죽계(竹溪) 김준(金準)을 추모하기 위한 죽계재(竹溪齋)가 보존되고 있다. 또 우창주효자각(禹昌柱孝子閣)이 전한다.
○ 원당골(元塘谷, 원장골)
대구령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은 덕대산의 아래쪽에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또 이 안쪽에는 보존굴(保存窟)이 있는데, 굴의 길이가 약 30m, 높이가 약 1.8m, 폭이 약 3m 정도가 된다. 임진왜란 때 인근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피난을 하였다고 전한다.
○ 구령산(龜齡山)
대구령동과 소구령동 사이에 있는 산이다. 산세가 마치 거북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또 이곳에는 고려 인종의 태실(胎室)이 있었다고 전한다.
○ 쇠피니
대구령동 마을 뒤 저수지 위쪽에 있다. 이곳에서 옛날에 철광을 채굴했다고 한다. 그래서 붙여진 지명이다. 또 철광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 당산곡(당산고개)
대구령동에서 소구령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지금도 이 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돌은 던지기도 한다고 하며, 또 돌무더기가 있다.
(5) 소구령(小龜齡, 소구연-小龜淵)
성만리의 북쪽 덕대산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대구말동에서 보면, 마을의 형세가 조그만 거북을 닮았다고 하여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또 옛 이름은 구령리(龜齡里)였다. 이 마을은 고려 중기에 변고적(卞高迪)이 이곳으로 전거(奠居)함으로써 밀양변씨(密陽卞氏)의 세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또 판서(判書) 변옥난(卞玉蘭), 춘당(春堂) 변중량(卞仲良),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의 삼부자(三父子)가 출생한 곳이다. 그래서 변계량이 사환중(仕宦中)에도 고향집을 왕래하며 서식(棲息)한 유적이 전해 오는데, 봉명대(奉命臺), 곡지(曲池), 괘인정(掛印亭) 등이 그것이다. 지금은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고, 이름만 전한다. 또 이 마을은 구령동안(龜齡洞案)의 발상지였다. 조선 후기에 밀성박씨(密城朴氏) 일파가 입촌하여 세거해오고 있다.
○ 뻔덕고개
소구령동에서 하남읍 남전리 보담으로 넘어 가는 고개이다. 하남읍 남전리와 경계 지점에 있다.
○ 탑골(塔谷)
소구령동 뒤쪽 덕은암(德隱庵)이 있는 곳에 있다. 원래 이곳은 덕은암(德隱庵)의 구지(舊址)였다. 지금의 덕은암이 다시 창건된 후에, 경내에 허물어진 석탑의 탑재를 모아 자연 암반에 가복원(假復元) 한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다. 이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나말여초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덕은암 주위에는 폭포수가 두 군데 있다.
○ 덕대산(德大山)
소구령동의 뒤산이다. 높이가 660m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덕산리에 속한다. 덕대산은 일명 덕성산(德城山)으로 옛 수산현(守山縣)의 진산(鎭山)이다. 산 정상부에는 성터가 남아 있는데, 신라 때 덕녀(德女)가 왜구를 방어하던 곳이라고 하여 덕대산 혹은 덕성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산성의 정상부에는 분지형(盆地形)으로 평평하고, 산의 형세대로 타원형의 능선을 따라 석축을 쌓았으며, 그 둘레는 약 2km, 폭은 1,8m, 높이는 3m 정도가 되는데, 거의 허물어지고 북동쪽에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석축이 남아 있다. 또 성내에는 큰 흙무덤이 있는데, 인근의 주민들은 '처녀무덤'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낙동강의 수산진(守山津)과 하남.초동평야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명산이다. 이 산성의 축성 연대는 대체로 3세기에서 4세기경으로 추정되며, 낙동강 좌안(左岸)의 요새로서 왜구의 방어와 가야 제국(諸國)의 정벌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아울러 고려시대까지도 국방상 중요한 요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기우처(祈雨處)가 되어 근대까지도 가뭄에 비를 비는 풍습이 전래되고 있다. 또 처녀무덤에 음력 8월 보름날에 장가를 못 간 노총각이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면,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장가를 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래선지 이 임자없는 무덤에는 매년 누가 했는지도 모르게 벌초를 매년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이 무덤 자리가 명당으로 알려져 탐을 내는 사람이 많았는데, 가만히 투장을 하고 나면 가뭄이 온다고 해서 아래 마을에서는 기우제를 지내지 않고 처녀무덤에 암장한 흔적이 있는지를 살펴서 그 유골을 파내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집에까지 오기 전에 비를 만난다고 전하고 있다.
○ 진등(長嶝)
탑골 동쪽에 길게 내려온 산등성이이다.
○ 절골등(寺谷嶝)
탑골 서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 진등골(長嶝谷)
진등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못안골
소구령동 남쪽 성만 저수지 동편에 있는 안쪽 골짜기이다.
출처 : 밀양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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