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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歸故園

쉬어가는 여유 2021. 7. 7. 15:58

初歸故園(초귀고원)--崔惟淸 1103~1174

처음 찾아온 고향

 

里閭蕭索人多換(이여소색인다환)

쓸쓸히 찾은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뀌었고

墻屋傾頹草半荒(장옥경퇴초반황)

집도 담도 무너질 듯 기울고 풀은 무성하기만 하네

唯有門前石井水(유유문전석정수)

오직 문 앞의 돌샘의 물은 그대로 있어

依然不改舊甘凉(의연불개구감량)

전과 다름없이 바뀌지 않고 맛 좋고 시원하구나.

 

 

※里閭:마을 어귀에 세운 문 ※蕭索:쓸쓸히 찾음 ※人多換:많은 사람이 바뀌다

※墻屋:집과 담장 ※傾頹:기울어 무너지거나 쏠려 넘어짐 

※唯有:오직 존재하는 것 ※依然:전과 다름없이 ※不改:바뀌지 않는 것

※甘凉:시원하고 맛이 좋다

 

▲내고향 밀양 초동의 두암마을

(1103~1174)

 

本貫은 창원(昌原). 字는 직재(直哉). 6세조 최준옹(崔俊邕)은 태조를 도운 공신(功臣)이며, 문종·순종·선종 3조(三朝)를 섬긴 중신 최석(崔奭, 崔錫)의 아들이다.

예종 때 科擧에 及第했으나 아직 學文을 이루지 못했다며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직한림원()이 되었으나 인종 초에 이자겸()의 간계로 평장사() 한교여()가 유배될 때 매서(婿)인 정극영()과 함께 罷職되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내시()가 되었고, 좌사간()·상주수()·시어사()를 歷任하였다.

1132년(인종 10) 예부원외랑()으로 진주사(使)가 되어 宋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어사중승()·전중소감(殿)을 거쳐, 1142년 간의대부()로서 금나라에 가서 책명()에 감사를 올렸는데, 崔惟淸의 말과 행동에 금인()들이 歎服했다고 한다.

그 뒤 호부시랑()에 제수되었고, 동북면병마부사(使)·승선()을 역임하였다. 1144년에는 동지공거()로서 지공거() 한유충()과 함께 진사() 김돈중() 등 26인에게 급제를 사()하게 하였다.

1147년(의종 1) 한림학사()로 『서경』의 「열명()」 3편을 의종에게 강설하였다. 그 해에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이듬해 지추밀원사 판삼사사()·병부상서()를 거쳐 1149년 지문하성사()·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다.

1151년 판병부사()를 겸직했으나, 처남인 내시낭중() 정서()와 왕의 동생 대령후 왕경( )이 참소를 입은 사건에 연루되어 남경유수사(使)로 좌천되었다. 1157년 대령후 왕경이 천안부()로 유배될 때 다시 충주목사(使)·광주목사(使) 등으로 좌천되었다.

1161년 봉원전대학사(殿)가 되었으나, 반대하는 자들이 있어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하였다. 1170년 정중부()의 난 때 여러 무인들의 보호로 화를 면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中書侍郞平章事로 除授되고, 1172년(명종 2) 수사공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殿)를 끝으로 官職에서 물러났다. 諡號는 문숙()이다.

著書에는 남도집, 유문사실, 최문숙공집, 이한림집주 等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崔惟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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