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中樞院 議官 安鍾悳의 上疏文

쉬어가는 여유 2021. 11. 24. 21:23

황제여!제발 정신 차려라.

 

 

 

 

  ▲光武 元年 1897년

 

▲광무8년(1904년) 9월 23일에는 전라남도 순찰사로 부임 하셨음

 

 

石荷 安鍾悳公은 나의 高祖父로 全羅巡察使 및 7개 고을의 郡守를 역임하셨으며 1841년에 밀양에서 태어나셔서 1907년 卒하셨다.

 아래 상소문은 2021년 11월 24일 조선일보에 실린 글을 캡쳐 한 것으로 "황제여,제발 정신 차려라"라는 소제목의 글에 안종덕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는 광무 8년(1904년)9월에 전라남도 순찰사로 부임하시기 전에 올린 글로 사료 됨

 

 

 

 

 

“백성에게서 갈취한 돈으로 남에게 빼앗길 궁궐을 짓는구나”

[박종인의 땅의 歷史] [281] 시대착오의 상징, 고종이 만든 평양 풍경궁 ②

1904년 3월 러일전쟁 종군기자인 미국 소설가 잭 런던은 대동문을 통해 평양성에 진입 중인 일본군 행렬을 목격했다. 헌종 계비 홍씨 국상 중이라 백립을 쓰고 있는 군중 속에 일장기가 보였다. /미국 헌팅턴대 도서관 잭 런던 컬렉션
입력 2021.11.24 03:00
 
 
 
 
 
 

* 유튜브 https://youtu.be/dRAcR5AcbG0 에서 동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1904년 2월 29일 대한제국 황궁인 경운궁(덕수궁)이 전소(全燒)됐다. 새벽녘 함녕전 온돌에서 발화한 불이 온 궁전을 홀딱 태웠다.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은 그날 아침 고종은 “궁색하지만 반드시 중건하라”고 명했다.(1904년 2월 29일 ‘승정원일기’) 두 번째 황궁인 평양 풍경궁은 정전 태극전과 동궁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부속 공사가 한창이었다.

석 달 뒤 개화파 지식인 윤치호가 일기를 쓴다. ‘이 황제는 이 저주받은 나라의 저주받은 백성에게서 갈취한 수백만원을 불타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쓸모없는 궁궐들을 짓는 데 낭비하고 있다.’(국역 ‘윤치호일기’ 5, 1904년 5월 27일, 국사편찬위)

281. 시대착오의 상징, 고종이 만든 평양 풍경궁②

조선을 휩쓴 전운(戰雲)

비슷한 때에 대한제국에 와 있던 미국 소설가 잭 런던은 이렇게 기록한다. ‘평양 주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평양이 (청일전쟁에 이어) 다시 전쟁터가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민 중 1만여 명은 이미 평양을 떠났고 다른 사람들도 계속 피란을 떠나고 있었다. 압록강 근처에서 내려오는 피란민 수만명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잭 런던, ‘조선사람 엿보기-1904년 러일전쟁 종군기’, 한울, 2011, p15)

그해 2월 8일 일본군이 청나라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극동함대를 공격했다. 다음 날 대한제국 제물포에서 또 다른 러시아 군함 2척이 일본군 공격에 침몰했다. 그리고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온 나라가 공사판이던 그때, 전쟁이 터진 것이다. 풍경궁은 일본군 병영으로 전용됐다가 식민 시대 병원으로 바뀌었다. ‘남에게 빼앗기리라’는 윤치호 일기는 예언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전쟁, 중립선언, 현금 250억원

1903년 8월 15일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밀서를 보냈다. 러시아를 염두에 둔 평양 풍경궁 공사가 막 시작된 때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누대의 원수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이면 대한제국은 반드시 러시아군을 돕고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겠노라.’(조재곤, ‘1904~05년 러일전쟁과 국내 정치동향’, 국사관논총 107집, 국사편찬위, 2005) 그해 11월 23일 광무제 고종이 선언했다. “장차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할 때 우리는 중립을 지킨다.”(1903년 11월 23일 ‘고종실록’) 중립 선언은 이듬해 1월 21일 공식화됐다. 군사력도 외교력도 없는 중립 선언은 열강에 의해 무시당했다. 2월 10일 러일전쟁이 공식 개시됐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2월 17일 고종이 창덕궁을 일본군 12사단 병영으로 사용하도록 칙허한 것이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23, 2. 전본성왕 (144) 창덕궁 일병 병사 사용칙허건) 그뿐 아니었다. 2월 23일 대한제국은 일본과 한일의정서라는 협약을 체결했다. 내용은 ‘조선 전역을 일본군 군사용지로 사용하도록 허락한다’였다. 특정 지역이 아니라 ‘임기(臨機)’, ‘마음먹으면 마음대로’ 어디든 수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일본군은 획득했다.

한 달 뒤인 3월 20일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황제를 알현했다. 그 자리에서 이토는 광무제 고종에게 30만엔(현 시가 250억원)을 선물로 주고 경부선 철도에 대해 고종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보장한다고 확언했다.(조던이 랜스다운 외무상에 보내는 편지, 1904년 3월 31일, 영국외무성 문서 FO/17/1659: 박종인, ‘매국노고종’, 와이즈맵, 2020, p332, 재인용)

피란민과 창덕궁 전승 파티

1년이 채 안 돼 황제는 친러 밀약을 중립 선언으로, 중립 선언을 구중궁궐과 조선팔도 일본군 사용지 제공으로 바꾸더니 현금 250억원과 철도 지분 확보로까지 바삐 움직인 것이다. 3월 4일 한성에 도착한 종군기자 겸 소설가 잭 런던은 이렇게 기록했다. ‘황제는 일본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라고 지엄하게 공포했다. 예를 들면 일본군이 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도록 자기네 군인들을 병사에서 쫓아내는 일 같은 것들이었다.’(잭 런던, 앞 책, p54)

8일 뒤 평양 옆 순안에서 잭 런던은 피란민들을 목격했다. 그들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산으로 은신처를 옮기고 있었다. 난민들은 처음에는 값나가는 것들만 가져갔으나 그런 일을 계속하다 보니 나중에는 집에서 쓰던 쇠로 만든 가재도구 심지어 문짝이나 창문짝까지 들고 갔다.’(잭 런던, 앞 책, p122)

5월 6일 일본군 병영으로 둔갑한 창덕궁 후원 주합루에서 구련성전투 일본 승첩 파티가 벌어졌다. 고종은 정3품 홍순욱을 ‘일본 진북군 접응관’에 임명해 파티에 대리 참석시켰다.(1904년 음력 3월 21일 ‘승정원일기’) 다섯 달 뒤 황제는 ‘먼 땅에서 여러 달째 비바람을 맞고 있는’ 일본군을 위해 육군 부장 권중현을 위문사로 보냈다.(1904년 10월 26일 ‘고종실록’)

평양 외곽에서는 피란민들이 바리바리 가재도구를 지게에 싣고 전쟁에서 달아나고 있었다. /미국 헌팅턴대 도서관 잭 런던 컬렉션

끝없는 부패와 착취

1904년 대한제국은 두 차례 국상을 치렀다. 헌종 계비 홍씨(1월 2일)와 황태자비 민씨(11월 5일)다. 음산한 전운과 매캐한 화약 냄새 속에 사람들은 상을 치르는 백립(白笠)을 쓰고 일상을 살았다. 북상하는 일본군을 따라 잭 런던이 평양에 입성했을 때 일본군을 맞은 조선 백성 또한 대개 백립을 쓰고 있었다. 평양성 동쪽 대동문으로 일본 보병이 진입할 때 백립 군중은 성벽과 문루와 바깥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평양성 서쪽 풍경궁 공사장에서는 목수들이 거목(巨木) 목재들을 다듬고 있었다. 정문인 황건문은 완공돼 있었고, 궁장 바깥에는 아직 목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3월 12일 종군기자들은 일본군을 따라 평양 북쪽 순안에 도착했다. 머핏이라는 선교사 알선으로 순안 주민이 런던에게 몰려와 이렇게 하소연했다. “일본군에게 군수품을 팔았는데, 군수가 70%를 떼먹었다.”(잭 런던, 앞 책, p144)

이미 ‘향례전(鄕禮錢)’과 ‘원조전(援助錢)’ 명목으로 1000만냥을 공사비로 털린 백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공식적 착취 아래 또 파렴치한 착취와 부패가 은폐돼 있는 것이다. 평양군수 팽한주는 무명 잡세를 마구 만들어 건축비 명목으로 150만냥을 강제 징수하고 있었고,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사나운 포졸 수십명이 난타해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1904년 9월 15일 ‘제국신문’) 평남관찰부 주사 박학전은 목재 수만그루 벌채와 운반에 주민을 징발하고 품삯을 떼먹고 목재 값을 횡령하고도 처벌을 받지 않았고(1906년 5월 16일 ‘대한매일신보’), 이로 인해 10만여 평양 주민은 모두 저며낸 어육(魚肉)이 될 판이었다.(1904년 11월 22일 ‘제국신문’)

매천 황현에 따르면, 공사 책임자인 평남관찰사 민영철은 ‘백성 재산 3분의 1을 적몰해 관아에 바치므로 유민(流民)이 서로 줄을 이어 천리길이 소란하였다. 그나마 자금은 토목비로 다 사용되지 않았다.’(황현, ‘매천야록’ 3권 1903년② 19. 고종 및 태자 초상화 풍경궁 봉안과 민영철의 탐학, 국사편찬위) 1904년 그 유민 무리에 잭 런던이 목격했던 전쟁 피란민들이 합류했다. 세상은 더욱 어지러웠다.

전쟁이 한창인 평양성 서쪽에서는 제2황궁인 풍경궁 완공을 위해 목수들이 한창 목재를 켜고 있었다./미국 헌팅턴대 도서관 잭 런던 컬렉션

 

 

“황제여, 제발 정신차려라.”

창덕궁 전승 파티 보름 뒤인 1904년 5월 21일 황제가 황명을 내렸다.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방도를 생각하지 않은 적 없으나, 탐학한 지방 관리들이 백성으로 하여금 근심과 고통을 나에게 호소할 수 없게 하였다. 이제 관리들은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 백성을 편안케 하라(廉勤公信以安斯民⋅염근공신이안사민).” 고종은 ‘廉勤公信以安斯民’ 여덟 글자를 직접 써서 각도에 내려보냈다.(1904년 5월 21일 ‘고종실록’)

 

두 달 뒤 중추원 의관 안종덕이 작심하고 이리 상소했다. “윗사람이 청렴하면 아랫사람이 감히 어떻게 탐오하는가. 폐하가 청렴하지 않은데 어찌 아래가 탐오하지 않겠는가. 나랏돈이어야 할 땅과 산과 못과 어장과 염전과 인삼과 광산을 왜 폐하가 가지고 있는가. 관리 월급이 없으면 대뜸 내탕금에서 꺼내서 주고 빚 독촉하듯 갚으라고 하지 않는가. 벼슬은 왜 파는가. 어찌하여 길거리에는 목재와 석재 수레가 끝이 없고 도끼와 톱 소리가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서경에 궁전을 건축하는 것이 나라에 무슨 이익을 주는가. 백성 원한을 쌓으며 폐하 초상화를 모셔놓는 게 어디서 나온 생각인가. 기근까지 닥치고 전쟁까지 덮친 마당에 백성을 부리다니.” 황제가 답했다. “말은 물론 옳다. 그렇지만 시의(時宜)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1904년 7월 15일 ‘고종실록’) 고종이 생각한 ‘시의(상황)’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열흘 뒤 이번에는 봉상사 부제조 송규헌이 상소했다. “군신 상하가 밤낮없이 바쁘게 뛰어도 모자랄 판에 어찌 토목공사나 벌이고 대궐을 수리하며 벼슬자리를 말아먹고 인재를 버리며 관리들을 마구 내보내 잡세를 거둬들이고 쓸데없는 관리들을 늘리는가. 특히 주청공사 민영철은 풍경궁 공사판에서 수많은 재물을 축적해 사리사욕을 채우고 국경 너머 도주한 자다. 속히 정죄하시라.” 이번에는 고종은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1904년 7월 25일 ‘고종실록’)

1925년 12월 13일자 ‘매일신보’ 3면. 평양 풍경궁에 있다가 이 해 경성 조계사 정문으로 이건된 황건문 사진을 싣고 있다. 풍경궁은 1904년 일본군 병영으로 수용됐다가 1914년 도립 자혜의원 본관 및 부속건물로 사용됐다.

‘남에게 빼앗긴 궁궐’과 기이한 황제

그렇게 질식할 것 같은 세월이 갔다. 내탕금 100만냥을 내려보낸 황제는 1000만냥짜리 궁궐을 얻었고, 나라를 외국 군사에게 내주고 황제는 30만엔과 철도 지분을 얻었다. 황제는 아래 관리들에게 청렴과 근면, 공정과 신의로 백성을 대하라고 명했고, 백성은 산속으로 숨었다.

1904년 8월 조선에 진주한 일본 한국주차군은 ‘한일의정서’에 따라 ‘임의로’ 평양 외성 일대를 군사용지로 수용했다. 풍경궁도 포함됐다. 궁에 있던 고종 부자 초상화는 1908년 4월 2일 덕수궁 정관헌으로 옮겨왔다.(1908년 4월 2일 ‘순종실록’) 풍경궁은 일본군 보병여단 사령부, 여단장과 부관 숙사 따위로 사용됐다. 이후 비워져 있던 풍경궁은 1914년 총독부가 주도한 도립 병원인 평양 자혜의원에 인수돼 병동과 사무실로 사용됐다.(김윤정, ‘평양 풍경궁의 영건과 전용에 관한 연구’, 부산대 석사 논문, 2007) 그리고 1925년 8월 정문인 황건문이 ‘통행 불편’을 이유로 매각돼 경성에 있는 일본 사찰 조계사로 이건됐다. 윤치호 예언대로, ‘백성에게서 갈취한 돈으로 지었다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궁궐’이 된 것이다.

1905년 7월 20일 최익환이라는 풍경궁 관리가 황제에게 이리 상소했다. “풍경궁 공사를 다시 벌여 완공하소서.” 황제가 이리 답했다. “의정부에 명을 내려 처리하겠다.”(1905년 7월 20일 ‘고종실록’) 풍경궁이 일본군에 수용되고 근 1년이 지나고 나라는 껍데기만 남아 눈 녹듯 사라지고 있던 여름날이었다.<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