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高祖父 中樞院 議官 安鐘悳의 上疏文

쉬어가는 여유 2012. 3. 31. 18:12

 

 

 

 

안종덕(安鍾悳) 1841∼1907   밀양(密陽) 출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태로(兌老), 호는 석하(石荷),

아버지는 문원(聞遠)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양로(良魯)의 딸이다.

정원(貞遠)에게 입양되었으며,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1882년(고종 19) 진사가 되었고, 같은 해 어사(御史) 이도재(李道宰)의 천거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그 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비서원승(祕書院丞)·영덕현감(盈德縣監)·청송군수겸선유사(靑松郡守兼宣諭使) 등을 역임하였다.


승정원일기에서


고종 37년 경자(1900, 광무 4)   12월27일 (갑자, 양력 2월 15일)

 

증 이조 판서 김용에게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 중추원 의관 안종덕 등의 상소

○ 중추원 의관 안종덕(安鍾悳) 등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옛날 융성하던 우리 선묘(宣廟) 때에 지극한 교화가 아름답고 성대하여 여러 현인(賢人)들이 배출(輩出)되었는데, 그중에는 유학을 흥기시켜 도학(道學)이 백대의 종사(宗師)가 될 만한 자도 있으며, 왕실(王室)을 도와 공로가 한 시대의 공신이 될 만한 자도 있었습니다. 도학에 근본하고 공로로 미루어 볼 때 우뚝하고 찬란하여 한 사람이 이 두 가지를 겸한 자는 오늘날에 와서 찾아보아도 또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고(故) 선무 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병조 참의 증(贈) 이조 판서 김용(金涌)은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공로를 보답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훌륭한 우리 조정으로서 응당 표창하고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어야 할 것인데, 광채가 가려지고 덕이 숨겨진 채 몇백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구별해 내어 우대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소대(昭代)의 흠결로서 공의(公議)가 애석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황상 폐하께서는 천명에 응하여 기강을 세우고 제왕의 일을 중흥(中興)하시어 선조(先朝)가 미처 행하지 못했던 일을 하루아침에 크게 행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열성조(列聖朝)의 훈구(勳舊) 신하까지도 표창하여 총애하며 벼슬을 주고 시호를 내려 주셨으니, 존숭(尊崇)하는 도리에 있어서 지극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셨으나, 밝은 일월(日月)조차도 환히 다 비추어 주지 못하는 곳이 있고, 커다란 천지조차도 한 가지 물건도 유감이 없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시호가 있고 없음이 김용의 덕에 있어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겠지만 구구한 신들의 답답한 심정에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기에 감히 그에 관한 사실들을 추려서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깊이 살펴 주소서.

고 판서 김용은 단종조(端宗朝)의 충신 김한계(金漢啓)의 5대손이요 문충공(文忠公) 김성일(金誠一)의 조카인데, 태어나면서부터 풍채(風采)가 수려하고 성품과 도량이 강직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조부인 판서 김진(金璡)은 집안에 전해내려 오는 문장검(文章劍)을 주어서 그에게 크게 허여하는 마음을 보여 주었고, 문충공 김성일은 그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말하기를, ‘가문의 기대가 너에게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장성해서는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문하에 찾아가서 수학하였는데,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에 대해 깊이 터득하자, 문하의 제자들이 그를 고제(高弟)로 추대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문충공 유성룡(柳成龍)의 이른바 ‘하늘이 이 사람을 낸 것이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한 것이 그 실례입니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한결같이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순종함을 위주로 하였고, 상(喪)을 당해서는 여묘(廬墓)와 장제(葬祭)를 반드시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랐습니다. 일찍이 작은 방 하나를 마련하여 독서하고 강학하는 장소로 삼고 ‘- 원문 빠짐 -’ 라고 편액을 단 다음 글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밝은 창문과 깨끗한 책상, 그리고 도서를 좌우에 두었다.’라고 한 것은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심경찬(心經贊)의 뜻이요, ‘몸가짐을 단속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상제(上帝)를 대하듯이 한다.’라고 한 것은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경재잠(敬齋箴)에서 얻은 공부이고, ‘심장의 안에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서 사체(四體)가 기거동작(起居動作)하도록 명령한다.’라고 한 것은 범준(范浚)이 지은 심잠(心箴)의 요지에 해당합니다. 지켜야 할 의리를 체득하여 반드시 ‘밖으로는 의(義)를 지키고 안으로는 경(敬)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고, 분노를 억제하고 사욕을 막는 방법에 경계하는 마음을 두어 반드시 ‘한 가지 잘못도 반드시 엄하게 징벌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양 학자들에게 경계하기를, ‘글을 읽고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조금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진실로 실천하지 않으면 일을 성취할 수가 없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곤궁하여도 의를 잃지 않고 현달하여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窮不失義 達不離道]는 것은 나의 팔자부(八字符)이다.’ 하였습니다.

문강공(文康公) 장현광(張顯光)이 만시(輓詩)를 짓기를, ‘아버지에게 어려서 올바른 가르침을 받았고, 처세(處世)함에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었네.’라고 하였고,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은 그의 묘지명(墓誌銘)에 이르기를, ‘군자의 가르침과 군자다운 사람이라는 것은 김용이 실천한 내용이니, 도학이 백세의 종사가 될 만한 점이 있는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선묘(宣廟) 경인년(1590, 선조23)에 과거에 급제하여 신묘년에 승정원(承政院)에 들어갔으며, 천거되어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는 곧바로 천연두에 걸렸는데, 상께서 중사(中使)를 시켜 방문하게 하여 말하기를, ‘타고난 성품이 이미 후덕하여 반드시 요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미모(美貌)야 어찌 변함이 없겠는가.’ 하였으니, 그가 벼슬한 초기에 이미 융숭한 은총을 입었음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리고 지방에 나가서 주군(州郡)을 다스릴 적에는 학교를 일으키고 문치(文治)를 숭상함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선산(善山)에 있을 때는 고려 충신 길재(吉再)의 서원(書院)을 중건하여 노경임(盧景任), 최현(崔睍)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마하였으며, 예천(醴泉)에 있을 때는 매달 초하루에 모여 강학할 때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동안(同安)과 남강서원(南康書院)의 학칙을 따랐으며, 여주(驪州)에 있을 때는 청렴하고 요구하는 것이 없어서 돌아올 때 배 안에는 오직 매화꽃 두 떨기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임진왜란을 당해서는 곧바로 안동(安東)에서 일어나서 즉시 초모문(招募文)을 지어 온 도(道)에 뿌렸는데, 그 내용에 대략 이르기를, ‘지금부터 죽고 사는 것은 적을 토벌하느냐 토벌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날 것이니, 국가를 위한 충성이 어찌 벼슬의 유무에 따라서 차이가 있겠는가. 일이 성공하면 신(神)과 사람에게 원통함을 씻을 수가 있을 것이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헛된 죽음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니, 며칠 지나지 않아 의병들이 크게 모여들었습니다.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이 김용을 추천하여 의병장(義兵將)이 되었는데, 그가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당시에 문충공 김성일이 본도(本道)의 우감사(右監司)로서 진양(晉陽)에 있었는데, 그를 격려하기를,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忠魂)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진양과 안동이 성세(聲勢)가 서로 호응하여 강좌(江左)의 수십 주(州)가 그에게 힘입어 온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대가(大駕)가 당시에 용만(龍灣)에 머물고 계셨는데, 길이 막히자 샛길을 경유하여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서는 1년이 넘도록 호종(扈從)하며 정성과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왜구가 다시 쳐들어와서 명사(明師)가 남하(南下)할 적에 당시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體察使)로 있으면서 그를 천거하여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곧바로 독운어사(督運御史)가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기근이 오래되어 공사(公私)가 극도로 궁핍하던 차에, 김용이 지극한 정성으로 군량미를 공급해 주어 거의 10만이나 되는 군사들이 궁핍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혼조(昏朝)의 난정(亂政)으로 서궁(西宮)이 유폐되자, 김용이 개연히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윤리가 무너졌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으로 들어가면서 시를 지어 사람들을 경계하기를, ‘원형을 만드는 데 있어서 어찌 굳이 내 모난 것을 깎아 내려 하겠는가. 일을 당해서는 우선 반드시 주관(主觀)을 세워야 하니, 만약 훌륭한 군자가 끝내 소인과 똑같이 변한다면 본래부터 보잘것없는 소인만도 못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가 편지를 보내기를, ‘이 시는 사람을 탄복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연이은 징소(徵召)에도 나아가지 않고 강상(綱常)을 부지(扶持)하고 명교(名敎)를 세워 마침내 온 영남의 인사(人士)로 하여금 윤리 강상을 무너뜨리는 잘못을 면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상은 김용이 조정에서 활동한 내역으로, 그 공로가 한 시대의 공신이 될 만한 점입니다.

아, 김용이 죽은 지 300여 년이 되었는데도 살펴볼 만한 훌륭한 언행들이 아직까지도 묻혀진 채 드러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견문이 적어서 다만 그 자세한 것은 감히 알지 못하나, 강직하고 총명함은 타고난 독실함에서 비롯된 것이요, 효도하고 우애하며 공손하고 겸손함은 집안에서 전해내려 오는 학풍(學風)에서 비롯된 것이며, 경(敬)과 의(義)를 모두 지키며 박문(博文)과 약례(約禮)를 적의(適宜)하게 행했던 것은 전수받은 연원(淵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평하고 청렴하며 부지런하고 삼가서 백성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복종하게 한 것은 치적(治績)이 지극히 성대하였기 때문이고, 의병을 창도하여 일으키매 가는 곳마다 승전한 것은 적개심에 불타는 충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대군(大軍)에 군량미를 보내 주어 궁핍하지 않게 한 것은 훌륭한 계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또 혼조(昏朝)에 살면서 곧은 절개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한 것은 기미를 잘 아는 현명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도학의 측면에서 보아도 저와 같이 숭고하고 국가에 대한 공로의 측면에서 보아도 이처럼 성대하니, 훌륭한 풍속을 세우고 명절(名節)을 장려하는 데 있어서 시호를 내리는 조처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황상 폐하께서는 속히 밝게 살피시고 아래로 공의(公議)를 따르셔서 증 이조 판서 김용에게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심으로써 성덕(聖德)을 빛내시고 유학을 다행이게 해 주소서. 신들은 지극히 절실하고 황공하고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

하였는데, 받든 칙지에,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상소의 내용은 의정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