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경남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대구말<모교인 초동중학교 앞에 있음>
변계량(卞季良)
1369(공민왕 18)∼1430(세종 12).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옥란(玉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이색(李穡)·권근(權近)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네살에 고시의 대구를 외우고 여섯살에 글을 지었다.
1382년(우왕 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생원시에도 급제하였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郎將)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1392년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천우위중랑장(千牛衛中郎將)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으며,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을 거쳐 1396년(태조 4)에는 교서감승(校書監丞)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태종초에는 성균관악정,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 그뒤 예문관제학·춘추관동지사 겸 내섬시판사·경연동지사 등을 거쳐, 1415년 세자우부빈객이 되었다.
이때 가뭄이 심하여 상왕이 크게 근심하므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圓壇)에 빌기를 청하여 태종이 그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보내 제사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리었다.
그뒤 태종말까지 수문전제학·좌부빈객·예문관대제학 겸 성균관대사성·우빈객·예조판서·경연지사·춘추관지사·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그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문서를 작성하였으며, 과거의 시관으로 선비를 뽑는 일에 지극히 공정을 기하여 고려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주위로부터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정도전(鄭道傳)·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문학가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화산별곡 華山別曲〉·〈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조선왕조의 건국을 찬양하였다.
저서로는 《춘정집》 3권 5책이 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하였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 樂天亭記〉·〈헌릉지문 獻陵誌文〉을 찬하였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변계량의 교양시
내해 좋다 하고 남 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의 아니면 쫓지마라
우리는 천성을 지키어 생긴대로 하리라
자기의 주관대로 곧게 살아야한다는 뜻을 가진 시로 유명하다.
내고향 초동을 빛내신 춘정 변계량 사후 약600년이 흘러 가고 있지만 아직도 선생을 기리는 마음은 영원하도다.
변계랑]
내해 죠타하고 남 슬흔(싫은) 일 하지 말며
남이 한다 하고 의(義) 아니면 좇지 말니.
우리는 천성(天性)을 직희여 삼긴 대로 하리라.
<해설>
내가 좋다고 남이 싫은 일을 하는 부류의 인간과 ,
내가 싫다고 남을 대신 시키는 부류의 인간이 있다.
이 작품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경계하며 의(義)를 지키고, 천
성을 올바르게 따라 살아가길 깨우치고 있는 작품이다.
주제 : 의(義)와 천성을 지키는 삶
치천하(治天下) 五十年에 부지(不知) 왜라 천하사를
억조창생(億兆蒼生)이 대기(戴己)를 원하느냐
강구(康衢)에 문동요(聞童謠)하니 태평인가 하노라
치천하 오십년 : 제요(帝堯)가 천하를 다스린 오십 년 동안
부지왜라 천하사를 : 천하의 일이 어떤지를 모르도다
강구 : 편안한 길거리
문동요 : 동요를 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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