別敬溫師(별경온사) --曹植--
경온대사와 이별하다
僧同雲入嶺(승동운입령)
스님은 구름과 함께 산봉우리 속으로 들어 가고
客向塵歸兮(객향진귀혜)
나그네는 더러운 세상으로 돌아가네
送爾兼山別(송이겸산별)
그대 보내고 산과도 헤어졌으니
奈如山日西(나여산일서)
서산으로 지는 해를 어찌할꼬?
※嶺:고개.재.산봉우리 ※塵:티끌.때.더럽히다
※奈:어찌
■曺植 (1501~1572)
本貫은 창녕(昌寧)이며 字는 건중(楗仲,健中)이고 號는남명(南冥)이다.김우웅.곽재우는 그의 文人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성운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으로 이사하여 山海亭을 짓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老莊的)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하였다. 즉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하여 경으로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외부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초학자에게 《심경(心經)》 《태극도설》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心性)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의 교육방법을 비판하고 《소학》, 《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우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황과 기대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출사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 곳곳에서 당시 폐정(弊政)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著書로 《남명가》 《(勸善指路歌)》 등이 있으며 諡號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