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나의 뿌리를 찿아서(廣州安氏 中郞將侯 部司猛公派)

쉬어가는 여유 2012. 3. 2. 10:52

逢山齊

위치:경남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1142-2

 

逢山齊는 廣州安氏始祖大將軍諱邦傑以下十二世의 壇이 있는 곳이며 38位의 先祖의 위폐를 모신 

按嶺祠가 있는 곳이다.

또한 咸安 安仁里에는 廣州安氏가 咸安으로 移居하여 최초로 터를 잡은 御史亭과 諱器할아버님의

墓와 첫째아드님이신 中郞將諱國柱할아버님의 墓가 있는 곳으로 廣州를 貫鄕으로 하는 安氏의 제2의

고향이기도 하다.

 

 

 

 

 

 

 

 

 

 

 

 

 

 

 

 

 

 

 

 

 

▼위치:경남 함안군 산인면 안인리186번지

 廣州安氏御史亭遺墟碑(이곳은 광주 안씨가 함안으로 이거한 후 약300년을 기거한 곳이다.)

 

 

 

 

 

▼위치:함안군 법수면 윤외리462-2

 中始祖 高麗神虎衛中郞將兼閤門祗侯廣州安公諱國柱之墓

 

 

 

 

 

 

 

 

▼위치:경남 함안군 법수면 대송리 산138-2

高麗奉順大夫判典農寺事廣州安公諱器墓

 

 

 

 

 

 

 

위치:경남 창녕군 대합면 주매리

忠順衛禦侮將軍副司猛廣州安公諱之墓(副司猛公派 일명 星巒派의 始祖 나의16代 조부님이시다)

 

 

 

 

 

 

 

 

 위치:경남 밀양시 초동면 두암리506번지

▼嘉善大夫行全羅巡察使廣州安公諱鐘悳之墓(高祖父)

 

 

 위치;경남 밀양시 초동면 두암리506

▼進士廣州安公諱肯洙之墓(曾祖父)

 

 

 ▼廣州安公諱秉均之墓(祖父)

 

안기(安器, 1324-1408)

선조 고려 봉순대부 판전농시사 부군 비음기(先祖高麗奉順大夫判典農寺事府君碑陰記) 임진년(1772)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순암선생문집 제21권 묘갈(墓碣)

공의 휘는 기(器), 성은 안씨(安氏), 관향은 광주(廣州)이다. 시조의 휘는 방걸(邦傑)인데 고려 태조를 도운 공훈이 있어 광주군에 봉해진 연유로 관향을 삼게 되었다. 시어사 휘 유(綏)에 이르러 함안배씨(咸安裵氏)에게 장가들어 함안군으로 이사했는데, 지금의 안인촌(安仁村)에 있는 관찰정(觀察井)과 사간정(司諫亭)은 모두 안씨의 옛 유적이다. 이 분이 휘 지(祉)를 낳으니 광록대부 판군기시사 상호군이다. 이 분이 휘 수(壽)를 낳으니 광정대부 도평의사사이다. 이 분이 휘 해(海)를 낳으니 봉선대부 침원서령 증 밀직부사인데, 곧 공의 부친이다.
공은 공민왕 충선왕이라고도 함 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봉순대부 판전농시사에 이르렀다. 공양왕 초에 질병을 칭탁하고 물러나 노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마쳤는데 향년 85세였다. 군의 북쪽 대산이(大山里) 송천(松川) 강석산(姜石山) 해좌(亥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모두 세 번 부인을 맞이했다. 초배(初配)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인데 중랑장 합문지후인 국주(國柱)를 낳았다. 중배(中配)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인데 좌참찬으로 사간(思簡)의 시호를 받은 성(省)을 낳았다. 후배(後配)는 강양이씨(江陽李氏)인데 생원 몽득(夢得)을 낳았다. 배위의 묘소는 모두 상세히 전하지 못하고, 공의 묘소 왼쪽으로 여섯 자 가량 되는 거리의 간좌(艮坐) 언덕에 큰 무덤이 있는데 대대로 전래하는 말에 심씨의 묘소라고 한다.
아, 지금 공의 시대로부터 4백 년 남짓 흘러 언행을 살필 수는 없다. 그러나 후손 가운데 널리 알려진 사람으로 좌랑 현(峴), 사간 팽명(彭命), 부제학 윤손(潤孫), 호조 판서 윤덕(潤德), 현령 의(義), 사간 구(覯), 판관 경우(景祐), 사서 증(嶒), 승지 사웅(士雄), 관찰사 용(容), 광양군 황(滉), 사옹원 정 대진(大進), 참판 응형(應亨), 필선 시현(時賢), 관찰사 헌징(獻徵), 승지 후열(後說) 등과 같은 이들이 있다. 이들은 혹 청절 혹 사업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도사 택(宅), 첨정 민학(敏學), 생원 여경(餘慶)은 유학으로 일컬어졌다. 그 나머지 이름난 벼슬로 드러난 이들이 줄을 이었고 자손들이 중외에 흩어져 살아 15, 16대에 이르도록 면면하고 또한 번성하니, 이 어찌 공이 선을 쌓은 나머지 끼친 음덕이 아니겠는가.
옛날에 비석이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 흐르는 동안 파멸이 되어 자획을 분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후손 명보(命普)·복신(福新) 등이 돌로 다듬어 비석을 새로 세우려 하여 나에게 비문을 짓도록 부탁하니,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삼가 가첩을 상고하여 비석의 뒷면에 써서 후예들에게 보인다. 때는 고려가 망한 지 381년 후인 임진년(1772, 영조 48) 12월 모일이며, 13세손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 정복은 삼가 기록한다

 

◎안국주(安國柱, 1340년 경 - 1420년 경)

고려 신호위 중랑장 겸 합문지후 안공 갈음기(高麗神虎衛中郞將兼門祇侯安公碣陰記) 임진년(1772)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순암선생문집 제21권 묘갈(墓碣)

공의 휘는 국주(國柱), 성은 안씨(安氏)이다. 그 선계는 광주인(廣州人)으로 고려대장군 휘 방걸(邦傑)의 후예이다. 중세에 휘 유(綏)는 전중시어사인데 배씨에게 장가들어 처가를 따라 함안군으로 옮겨서 살았다. 지금의 안인촌(安仁村)에 유지(遺址)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이 분이 공에게는 5대조가 된다. 광록대부 판군기시사 상호군 휘 지(祉), 광정대부 도평의사사 휘 수(壽), 봉선대부 침원서령 증 밀질부사 휘 해(海), 봉순대부 판전농시사 휘 기(器)는 곧 공의 위 4대이다. 판사공이 안렴사 청송(靑松) 심해(沈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중랑장 합문지후에 이르렀는데, 나라가 망하자 벼슬하지 않았다. 공의 장남은 고려조의 생원이었는데 우리 태종이 찰방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돌아가시기에 이르러 영상 조석문(曺錫文)이 만사를 지어 애도하기를,


雨中簑笠騎牛客。비 속에서 사립을 쓰고 소를 탄 나그네여
曾向金門待詔歸。일찍이 대궐문을 향하여 조칙을 기다리다 돌아갔네
栗里田中鋤晉草。율리(栗里)의 밭 가운데 진(晋) 나라 풀을 매고
首陽山上採殷薇。수양산에서 은(殷) 나라 고사리를 캐었도다
弟兄湛樂如君少。형제가 화락하기는 그대만한 이 적었고
父子貞忠似子稀。부자의 곧은 충성은 자네만한 이 드물었네
內賜靑袍時把泣。임금이 하사한 푸른 도포를 때로 붙잡고 울더니
至今遺淚未全晞。지금껏 남은 눈물 다 마르지 않았다오

라고 했는데, 공의 출처의 큰 절개는 세대가 아득히 멀어 비록 상세히 알수는 없으나 앞의 만사 가운데 이른바 ‘부자의 곧은 충성’이라는 말을 여러차례 반복하여 기림에 그 망복(罔僕)의 충절을 볼 수 있다.
공은 4남 5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강(岡)인데 생원이고, 다음은 헌(巚)인데 후사가 없고, 다음은 현(峴)인데 좌랑이고, 다음은 제(齊)이다. 딸은 소감 양택(楊澤), 감무 허거(許秬), 부령 홍은(洪誾), 유좌명(兪佐明), 석여강(石汝剛)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현손 사간 구(覯)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였고, 조정에 있어서는 청명(淸名)이 있었다. 사간공의 아들 좌랑 증(嶒)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과 친한 사이였는데 을사년(1545, 인종 1)의 사화(士禍)에 화를 당하였다. 7대손 옥천(玉川) 여경(餘慶)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과 사귀어 도의로 드러났으며, 도사 숙(璹)은 정인홍의 북당(北黨)에 물들지 않아 절행(節行)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렇게 개석(介石)의 곧은 조행(操行)이 혁혁하게 대대로 서로 전한 것은 아마 공의 여운(餘韻)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리라. 아, 성대하도다. 이 글을 비석에 새길 때는 석여강(石汝剛) 이하의 자손록을 다음과 같이 고쳤다. 장남 생원공의 자손은 사성 숙선(淑善), 시직 숙량(淑良), 사간 구(覯), 진사 영(嶸), 사서 증(嶒), 생원 수연(守淵), 참봉 종경(宗慶), 생원 여경(餘慶), 부정 신(㺬), 정랑 숙(璹), 감찰 전(琠), 생원 시진(時進)·시퇴(時退), 학정 후정(后靜)이 있다. 삼남 좌랑공의 자손은 생원 여거(汝居), 교관 인(仁), 현령 의(義), 참봉 세기(世機), 첨정 응호(應虎)가 있다. 사남 제의 자손은 진사 효인(孝仁), 직장 효의(孝義)가 있다. 혁혁하게 대대로 빛나는 벼슬이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으니, 아, 흥성하기도 하여라.
묘소는 마륜리(馬輪里) 명달전(明達田) 감좌(坎坐) 언덕에 있는데, 오래도록 비석이 없었다. 원손 명보(命普)·복신(福新) 등이 비석을 세워 드러내니, 때는 홍무(洪武) 임신년(1392, 태조 1)으로부터 381년 후인 임진년(1772, 영조 48) 11월 모일이다. 방후손 익위사 익찬 정복은 삼가 기록하다.


[주D-001]율리(栗里)의……풀을 매고 : 진(晉) 나라 도연명(陶淵明)의 고사. 진 나라가 망하고 유송(劉宋)이 서자 정절을 지켜 율리(栗里)에 들어가 살았는데, 율리는 팽택현(彭澤縣)에 속한 땅이었고 지금은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서남쪽에 있음.
[주D-002]수양산에서……캐었도다 : 백이(伯夷)의 고사. 백이는 고죽군(孤竹君)의 아들로 주(周) 무왕(武王)이 은(殷) 나라를 정벌하자 아우 숙제(叔齊)와 함께 수양산에 숨어 살면서 고사리를 캐먹고 세상을 마쳤는데, 당시에 채미가(採薇歌)를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다고 함. 《史記 伯夷列傳》
[주D-003]망복(罔僕) : 망국의 신하로서 의리를 지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으려는 절조를 말함. 은(殷)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할 무렵 기자(箕子)가 “은 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商其淪喪 我罔爲臣僕]”라는 말에서 유래함. 《書經 微子》
[주D-004]개석(介石) : 때가 이르는 기미를 알고 굳게 그 절개를 지키어 떠남을 말함. 《주역》 예괘(豫卦) ‘육이효(六二爻)’의 효사(爻辭)에 “介于石 不終日貞吉”이라고 한 말에서 유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