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고조부의 스승이신 性齋 許傳先生에 對하여

쉬어가는 여유 2012. 2. 28. 13:32

 

  • 생몰년 : 1797-1886
  • 시대 : 조선
  • 분야 : 문신/관료 > 문신-조선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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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전(許傳)
    1797(정조 21)∼1886(고종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 포천출생. 정언 형(珩)의 아들이다.
    황덕길(黃德吉)의 문인으로 성호학파(星湖學派)의 계승자가 되었다.
    1835년(헌종 1) 39세에 비로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40년 기린도찰방(麒麟道察訪), 1844년 전적(典籍)·지평(持平)을 거쳐 1847년에 함평현감으로 나갔다가 1850년(철종 1)에 교리·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춘추관기사관을 역임하였다.
    이로부터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에게 유교경전을 해설하는 학자적 관료로서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1855년에 당상관이 되어 우부승지와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1862년 진주민란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민란의 소요가 일어났을 때 3정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864년(고종 1) 김해부사에 부임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하여 유도를 크게 일으켰다.
    또, 공무의 여가를 이용하여 젊은 선비들을 모아 직접 교육을 하였고, 임기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이어 1876년 정헌대부(正憲大夫), 1886년에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다.
    이익(李瀷)·안정복(安鼎福)·황덕길을 이은 기호(畿湖)의 남인학자로서 당대유림의 종장(宗匠)이 되어 영남 퇴계학파를 계승한 유치명(柳致明)과 더불어 학문적으로 쌍벽을 이루었다.
    그의 사상은 주로 경연에서 경의(經義)와의 관련에서 항상 실심(實心)·실정(實政)을 강조하였을 뿐 아니라 현실에 투철하여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저서로는 《성재집》·《종요록 宗堯錄》·《철명편 哲命編》이 있고, 선비의 생활의식을 집대성한 《사의 士儀》가 있다.

     

    性齋 許傳의 일생과 김해의 문풍(文風)

     

    文憲公 性齋 許 傳의 일생과 김해의 문풍(文風)               (굴어당에서 퍼온글)

     

    1. 산청군 신등면 평지리 법물마을에 ‘이택당(麗澤堂)’이란 옛 건축물이 있다.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양에 힘쓰는 집이란 뜻의 이름이 붙은 이 건물은 조선 후기 성호학파의 학문을 계승한 성재 허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건립한 것이다.
    곧 이택당은 1890년 만성 박치복을 중심으로 하는 이 지역 선비들이 모여 ‘성재선생문집(性齋先生文集)’을 간행하기 시작해 1년만에 완성하고 세운 건물로 성재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성재 허선생의 문장과 도덕이 당세의 유종이 되었으므로 사방학자가 많이 귀의하였다.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니 문제자가 서로 말하기를 사람이 있은 즉 도가 사람에게 있고 사람이 없으면 도가 글에 있으니 글은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조각하는 사람에게 명하여 판각을 조성한 후 단성 법물리에 집을 지어 보관을 하고 그 옆에 본당을 창건하여 학자들이 공부할 장소로 삼았다. 시종토록 일을 주선한 사람은 만성옹이고 옆에서 도운 사람은 나의 벗 치수이다"


    후산 허유가 지은 이택당 기문의 일부분이다.  만성 박치복, 물천 김진호 등 당대 이 지역 학문을 주도하던 선비들이 학덕을 길이 계승하고자 노력한 성재 허전은 한말 강우지역 학풍을 진작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허전의 자(字)는 이노(而老),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1797년에 포천현(抱川縣) 본동(本洞)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바탕이 영특하고 호매하였으며 어려서 가학을 이어 받아 먼저 효경을 읽었다. 관례가 끝나자 아우 와 함께 하려 황덕길(黃德吉) 의 문하에 종유하여 학문을 익혔다.

    하려는 일찍이 성호 이익의 제자인 순암 안정복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성재의 부친인 일천공과 도의지교를 맺고 지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두아들에게 가서 배우기를 명령한 것이다. 


    하려가 성재를 문하에 머물게 하고 두루 경전을 읽히고 곁으로 제자사서의 상세한 말과 그윽한 뜻까지 섭렵하게 하니 한번 읽어 내려다자 문득 깨달았다.
    하려가 기뻐 말하기를“우리 학문의 진결을 전할 사람이다”라고 까지 했다.
    39세 때 증광시 문과에 급제를 해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의 벼슬이 내려졌다. 
    44세 때는 외직인 기린도 찰방으로 나가게 되었다. 성품이 강직한 성재를 조정에선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직으로 나갔는데, 마침 그 지역에 흉년이 들고 호랑이 출몰도 잦아 백성들이 모두 그물을 쳐놓고 살고 있었다. 성재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사나운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하니 호랑이 해만 생각할 것이 못된다”하고 그물을 걷게 했더니, 호환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는 성재가 백성들을 잘 다스렸다는 방증의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안찰사 조두순이 성적을 최고로 매기면서 말하기를 “지금 이세상에 기린이 없다고 들었는데 기린이 여기에 있었구나”라고 했다.

    선정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인 45세 때 벼슬을 잃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관할역을 지나가다가 무리한 요구를 하자 이를 거절하였는데, 이일로 사신이 돌아오는 길에 무고를 하여 파직이 된 것이다.
    얼마후 다시 등용되어 성균관 전적, 사헌부 정언, 이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52세 때 다시 함평현감으로 나갔다.
    성재의 새로운 임지인 함평은 궁벽한 곳이었다. 백성의 풍속이 투박하여 정사를 베풀수 없을 정도였는데, 성재는 “나는 이제부터 형율로써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겠다”하고 형벌기구를 모두 없애 버리고송사가 있으면 효도 공경 친목의 도리로써 깨우쳤다. 경내의 학도들을 뽑아 향교에 모아놓고 경전, 사서(史書)등을 익히게 했다.

    외직으로 나가 치적을 쌓고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 홍문과 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등의 벼슬을 역임하면서 경연에 들어가 소학을 강론하기도 했다.
    소학 강론을 마치고 임금께 아뢰기를 “인금은 지극한 정성으로 삼정승을 거느리고 삼정승은 지성으로 육판서를 거느리고 육판서가 지성으로 모든 관원을 거느리고 모든 관원이 지성으로 모든 백성을 거느린다면 사람마다 제각각 양심을 속이는 일이 없어 천하가 모두 교화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다스리는 사람들의 올바른 길을 강조했다.

    몇달 뒤 시경을 강론하고는 “지금 벼슬아치들이 사사로운 욕심을 가지고 공적인 도리를 뒤로 한다면 의로운 기운이 상실돼 직무을 바르게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사를 보내도 정치를 바로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어진사람들을 뽑는 방안에 깊이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성재는 누구보다도 예법에 조예가 깊었다. 경연에 나가 임금에게 예전(禮典) 편수를 주청하면서, 나름대로 자신의 주장을 펴기도 했다.

     

    “무릇 예란 것은 존비귀천(尊卑貴賤)의 등급을 높이고 내리는 질서 정연한 것으로 어지럽힐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는 하늘의 이치이며 인간의 행동 법칙입니다. 나라가 있고서는 하루라도 없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순임금이 급히 예법책을 편찬한 까닭입니다. ”며“이제 기강이 풀어지고 명분이 문란하여 제도가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사치가 넘치는 기풍이 성하니 사치의 버릇이 넘치면 나라가 어찌 되겠으며 백성이 어찌 백성답겠습니까.  예전을 편수하여 풍속을 이끄시면 옛날 선왕들과 치적이 비슷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후 성재는 경연에 나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바른 도리 등을 강론하면서 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64세 때 예서인 사의(士儀)를 완성했다. 고금의 예설을 널리 구하여 경전의 요지에 맞도록 편찬한 책으로, 조선 오백년 예학의 결산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한다.
    이듬해 ‘수전록(受廛錄)’을 편찬하고 66세때는 ‘종요록(宗堯錄)’을 지었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육경의 공부는 함께 도에 들어가기 위해서인데 고의 전체와 그 쓰임은 대학에 밝혀 놓았다. 옛 성현의 도통 심법은 모두 대학에 있으니 공자가 도를 증자에게 전한 것도 이 책에 있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올수록 더욱 도가 쇠퇴해져 누가 대학을 쓴 종지나 요점을 알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면서“대학이 못난 나에게도 전해졌으니 참람함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감히 장을 이끌어 표시하여 천민(天民)이나 경덕(敬德)같은 도설(圖說)을하였으며 경전이나 선유들의 말을 수집하여 무릇 수지치인에 유익한것은 종류를 나누어 붙여 종요록이라고 명명한 것”이라고 했다. ‘종요록(宗堯錄)’은 이상적(理想的) 군주상(君主像)을 그린 성재의 저서로, 임금이 옛날 성인인 요임금의 치적을 본받았으면 하는 자신의 바람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재는 자신의 풍부한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임금을 바르게 이끌기 위해 경연에서 많은 강론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여러 저서들을 편찬하기도 했다. 당시 정승인 조두순 같은 사람들은 성재를 보고 “왕을 도울 인재”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성재는 68세 되던해 2월 우부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효경을 강론한 것을 끝으로 3월 김해도호부사를 제수받아 임지로 내려온다. 성재와 영남의 선비들과 인연이 김해로 내려오면서 비롯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강우유맥(江右儒脈)의 큰 획을 남기기도 했다.

     

    2. 1864년 고종이 등극하자 성재는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경연에 입시하여 어린 국왕을 위해 ‘효경’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이어 김해도호부사로 제수받아 김해로 내려오는데, 이때가 그의 나이 68세였다. 성재는 김해부사로 내려와 주로 경연에서 임금을 깨우쳤던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이 지역 문풍(文風)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성재는 퇴계 이황-한강 정구-미수 허목-성호 이익-순암 안정복-하려 황덕길로 이어지는 기호남인의 학맥을 계승했다.


    그의 제자인 허훈은 “옛날에 퇴계 이선생께서 동방에서 학문을 창도하시어 실로 연원의 정맥을 여셨고, 한강 정선생은 그 종지를 얻어 미수 선생께 전했으며 다시 성호, 순암, 하려 세 군자가 그 뒤를 이어셨다. 이에 우리 선생께서 우리 유학을 부지하여 능히 남기신 뒤를 이어셨으니, 그 공이 크다고 하겠다”라고 하여 성재가 퇴계에서 성호로 이어지는 ‘근기남인(近畿南人)’의 학맥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아무튼 성재가 김해부사로 내려온 것이 계기가 되어 영남일원의 성호학을 계승한 학자들이 문하에 몰려들면서 당시 영남의 학풍 즉 경상우도의 학풍을 크게 진작시키게 된다.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 단계 김인섭(金隣燮), 물천(勿川) 김진호(金鎭祜),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삼원당(三元堂) 허원식 등 경상우도 지역의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이 시기에 입문했다.


    1864년 3월 김해에 부임한 성재는 곧바로 백성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며, 안으로 관리들을 결속하고 법에 따라 엄격하게 다스릴 것을 내용으로 하는 회유문(回諭文)을 반포하여 목민관으로서 바른 자세를 보여주었다.
    80세 이상된 노인들을 위문하여 쌀과 고기를 내림으로써 민심을 모았으며 향약을 새롭게 하여 향교 벽에 게시하고 약장(約長)을 뽑아 매월 조문을 읽고 상벌을 내리게 하여 심한 자는 관가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야국의 시조로서 김해에 모셔져 있는 수로왕릉을 배알하고, 관내에 있는 서원을 참배함으로써 유학자로서의 자세도 보여 주었다.


    성재는 유학진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부임하던 해 가을에 이 지역의 유생들을 모아 향교에서 ‘향음주례’를 시행하고 김해향교 유생들에게 회유문을 내려 옛날의 법도를 회복하는데 힘쓰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인근의 많은 유생들이 모여 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성재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이들과 함께 명륜당에 모여 강학을 하였다,

    이듬해 봄(1865년)에는 자신이 거처하던 공여당(公餘堂)을 개방하여 인근의 학자들을 맞이했는데 이때 그에게 와서 배우기를 청하는 자가 1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성재는 문도들과 함께 봄에는 ‘향음주례’를 시행하고 가을에는 다시 관내의 함허정(涵虛亭)에 모여 강학을 했다. 함허정은 남명선생도 자주 찾아 시를 읊조렸던 유서깊은 정자였다.
    1866년 2월에는 신산서원(新山書院)의 원장이 되어 남명선생이 학문을 수양했던 산해정을 찾아 문도들과 강학을 했다. 또 4월에는 한가한 틈을 타서 휴가를 얻어 경상도내 여러 사당과 서원을 방문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50~60명의 문도들이 모여 강학을 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5월에는 노필연 조응규 등을 비롯한 70여명의 문도들과 함께 함안의 합강정(合江亭)에 모여 유람을 하고 그때 지은 시를 모아 ‘용화동주록(龍華同舟錄)’을 남겼다.
    합강정은 함안 용화산 아래에 있는데, 간송 조임도가 지은 정자로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이 배를 띄워 유람을 했던 유서깊은 곳이었다.
    성재는 김해부사로 재직하면서 아전들이 민생을 해칠까 염려하여 추호도 사사로운 마음을 가지지 못하도록 경계를 했고, 백성들에게도 바른 도리를 마음을 두고 본업에 열심히 노력하여 옳지못한 일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그의 이러한 치적은 조정에 보고 되어, 임금이 친히 글을 내려 칭송을 하고 상으로 겉옷과 속옷 한 벌을 내리기도 했다.
    이때 임금이 성재에게 내린 글에“경이 김해부에 부임함으로부터 선비들은 스승을 얻은 자랑이 있었고, 이제 성적을 보니 백성들은 유임을 간절히 원하니 진실로 옛날의 어진 수령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수 있다. ”라고 했다.
    이 지역 선비들과 백성들은 성재의 유임을 바랐건만, 3년 임기를 채우자 곧바로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김해를 떠날 때에 수백명의 백성들과 유생들이 전송을 했고 인연을 맺은 일부 제자들은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기도 했다.

    성재는 3년동안 부사로 있으면서 반드시 도포와 갓을 단정히 하고 사무를 보았는데, 날씨가 추우나 더우나 한결같이 하여 백성들을 만날때 평상복으로 만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성재는 김해를 떠나 있으면서도 1878년 대호군의 직책으로 가락국 수로왕릉에 전호(殿號)를 내리고 능관(陵官)을 둘 것을 상소했다.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침전(寢殿)을 개축하여 숭선전(崇善殿)이라고 사액을 하고 능참봉을 두어 김씨와 허씨들이 번갈아 소임을 맡게했다.


    성재는 90세 되던 해인 1886년 6월에 설사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9월에는 병이 더욱 깊어갔다. 이때 성재는 자신의 상례를 간략하게 하도록 하고 자신이 지은 ‘사의(士儀)’와 ‘가의(家儀)’를 규범으로 하여 후손들을 가르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곧이어 9월 23일 성재는 불권당(不捲堂)에서 구순의 일생을 마쳤다. 부음을 들은 고종은 조회를 그치고 시장을 철시토록 명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1888년에는 문헌(文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성재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은 학덕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제자 박치복 등이 중심이 되어 산청에서 성재문집을 간행했으며, 1927년 김해에서는 취정재(就正齋)를 건립하고 영정각을 세워 김해 백성들에게 끼친 공을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성재는 90년의 일생동안 관직에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 양성과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문집은 원집(原集) 33권, 속집(續集) 6권, 부록(附錄) 6권 등 45권이 전한다. 단행본으로는 사의(士儀), 사의절요(士儀節要), 철명편(哲命篇)등 9권이 전한다.
    성재 허전이 3년동안 김해부사로 재직한 것이 강우지역과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90평생을 산 성재에게 김해에서 보낸 3년 기간은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이 기간동안 그가 남긴 영향은 결코 적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문하에 출입했던 많은 선비들이 이후 강우유맥(江右儒脈)의 주도적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은 그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