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산의 한 뙤기는 내 것이 아니로다”
야은(冶隱) 길재에게 조선개국 입사(入仕)를 간곡히 권유했던 태조 이성계가 거절 답신을 받은 후 그의 충절을 칭찬하며 읊조린 말이다. 천하를 손에 넣었던 태조지만 한 선비의 절의 앞에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휘호를 내려 안타까움을 전했을 뿐이었다. 선생 타계 후 350년이 지난 후 영조 44년에 지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채미정’(採薇停)을 세우고 선생의 뜻을 기렸다. 이때부터 금오산은 ‘채미정’을 매개로 백이, 숙제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공간인 수양산으로 통용되었고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역의 선비들은 수양산(금오산) 기슭에 묻히는 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
금오산의 고려시대 명칭은 남숭산(南嵩山). 중국 5악(五嶽)중 하나인 숭산(嵩山)과 닮았다하여 유래되었다. 고려 문종은 왕자를 이산에 출가시켜 수도케 했다. 준령, 산맥 자태를 갖추지 못한 산에 숭(嵩)자를 붙여 예유한 뜻은 예사롭지 않은 산세와 기운의 품격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인물의 반(半)을 배출한 고장=일찍이 신라시대 도선(道詵)국사는 도선굴에 들어와 수도했고 조선시대 성현의 ‘용재총화’나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이 지역이 ‘인재의 요람’임을 칭찬하고 있을 정도로 금오산은 영험한 정기를 팔도에 드리우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임란 때 왜구는 물론 명나라 사신들까지 선산 뒤쪽의 맥을 끊고 숯불에 달군 쇠못을 박아 정기를 눌렀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산행 중에 왜구의 약탈흔적과 일제의 문화침략 현장을 발견한 것은 충격이었다. 고려말 왜구는 가장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당시 왕조는 왜구 격퇴에 국방과 군수(軍需)의 대부분을 집중해야할 정도. 이성계, 최영 같은 군사실력자들의 등장도 이런 시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왜구의 침입에서 금오산도 자유롭지 못했다. 고려 말 왜구는 부산, 진도, 삼포 같은 해안가는 물론 상주, 의성 같이 내륙까지 마수를 뻗쳤다. 옛부터 영남과 한양을 잇던 추풍령의 길목이었던 금오산은 왜구의 노략질의 좋은 타겟이었다. 조정에서는 금오산성을 쌓아 왜구의 침입에 대비케 했다. 지금 대혜(大惠)폭포 아래에 위치한 성곽이 바로 그 산성이다.
또 하나는 대혜폭포의 명칭과 관련된 일제의 추문이다. 일제 때 이 곳 관리였던 일본인은 폭포를 즐겨 찾았는데 그 비경에 감탄한 그는 사사로이 명칭을 ‘명금폭(鳴金瀑)’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창씨개명과 지명을 멋대로 유린한 그들이었으니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이름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던진 우리의 정서를 생각하면 그들의 악행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대혜폭포 보다는 명금폭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가 최근에 바로잡은 것이다.
#일본인들 멋대로 지명 뜯어 고쳐=금오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코스가 있지만 다 정상과 산성으로 통한다.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곳곳을 돌아보려면 공원관리사무소-케이블카-금오산성-대혜폭포-정상-약사암을 돌아오는 6.7km 코스가 적당하다.
산행 길 중턱에서 만난 대혜폭포. 시원한 물줄기와 28m 낙차 굉음을 기대했는데 우리가 찾았을 땐 갈수기라서인지 수량도 적고 물도 탁했다.
대혜폭포 뒤편의 ‘할딱고개’는 정상에 오르는 과정의 가장 큰 난관. 웬만큼 산에 단련된 등산객들도 이곳 너른바위에서 한숨 돌리고 활기를 회복하곤 한다. 발밑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구미시 전경이며 약사봉 위용이 노고를 풀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9부 능선에서 만나는 내·외성유적은 호국의 현장이다. 조선 영조 때에는 주둔 병력이 3,500명에 이를 정도로 국방의 요충지였고 성벽의 전체 길이도 6.3km에 달한다고 한다. 해발 800m지점의 ‘성안마을’유적은 금오산의 또 하나의 추억이자 자산이다. 한말 무렵에는 40여 호가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며 해방을 전후해서도 10여 호가 명맥을 유지했다고 한다.
성안마을에는 ‘9정7택’(九井七澤)이 있어 성내의 용수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화전민 정리사업 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이 성안마을이야말로 고려 말엔 왜구 피난처로 병자호란 땐 호국의 성터로 한국전 당시엔 통신기지로 그 소임을 다했다.
#현월봉, 약사암, 도선굴, 곳곳에 비결=금오산의 명소로는 아슬아슬한 바위에 걸친 듯 세워진 약사암, 폭포언덕에 우뚝선 해운사, 도선선사의 수양처 도선굴 등을 든다. 그러나 초저녁 툇마루에 초승달이 걸려있는 모습에서 이름을 얻었다는 현월봉(懸月峰)의 운치나 철탑 뒤쪽에서 바라본 약사암 전경을 절경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실 약사암은 자체로 비경이다. 대부분 등산객들이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들르는 탓에 절마당에서 시가(市街) 조망만 즐기는데 그친다. 현월봉에서 철탑 뒤쪽으로 돌아 암자 맞은편 봉우리로 가면 진경 ‘피사체(被寫體)’로서의 약사암을 새로운 느낌으로 만날 수 있다. 보통 훌륭한 산세에 이 산의 내력을 밝혀줄 사찰하나쯤, 여기에 정부나 자치단체의 공인요건을 갖추었다면 인기 산의 반열에 둘만하다. 금오산은 수려한 산세와 명승고찰과 도립공원이라는 명성까지 구비했으니 명품산행코스로 부족함이 없다. 여기에 길재의 충절에 역사·문화·생태 탐방요건까지 더불었으니 명산의 대열에 합류시켜도 부족함이 없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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