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朝鮮王朝實錄에 수록 된 安鐘悳의 글 모음(둘)

쉬어가는 여유 2012. 5. 4. 14:10

 

 

□ 고종 41권, 38년(1901 신축 / 대한 광무(光武) 5년) 2월 15일(양력) 1번째기사
중추원 의관
안종덕이 시호 제정에 대한 상소를 올리다

 

【국역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안종덕(安鍾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옛날 융성하던 우리 선묘(宣廟) 때에 지극한 교화가 빛나고 성대하여 여러 현인(賢人)들이 배출되었는데, 그중에는 유학을 흥기시켜 도학(道學)이 백대의 종사(宗師)가 될 만한 사람도 있으며, 왕실을 도와 한 시대의 공신으로 될 만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날에 와서 찾아보아도 보기 어려운데 고(故)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김용(金涌)이 바로 그러한 사람입니다.
공로를 보답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훌륭한 우리 조정으로서는 응당 표창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베풀었어야 할 것인데, 몇 백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구별해 내어 우대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밝은 시대의 흠결로서 공론이 애석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풍속을 똑바로 세우고 명절(名節)을 장려하는 입장에서 시호를 내리는 조처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함으로써 성덕(聖德)을 빛내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의정부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원본】 45책 41권 5장 A면
【영인본】 3책 198면

 

 

【原文】 

十五日。 中樞院議官安鍾悳疏略: “昔惟我宣廟晠際, 至化彬蔚, 群賢輩出。 有興起斯文, 道學可以爲百世之宗師, 有協贊王室, 可以爲一代之勳臣者, 求諸當日, 亦所罕見, 而故宣武原從功臣金涌卽其人也。 以我朝樹勳奬學之盛, 宜其有褒嘉易名之典。 而迄于幾百載, 尙未克旌別而優異之, 玆豈非昭代之欠缺、公議之嗟惜者乎? 其在樹風聲、勵名節之地, 合有太常之紀績。 伏願特施賜諡之典, 以光聖德焉。” 批曰: “疏辭令政府稟處。”
【원본】 45책 41권 5장 A면
【영인본】 3책 198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사상-유학(儒學) / *인사-관리(管理) / *풍속-풍속(風俗)

 

□ 고종 41권, 38년(1901 신축 / 대한 광무(光武) 5년) 8월 6일(양력) 3번째기사
의관
안종덕이 임진란 때의 충신 서예원을 추증할 것을 청하다

 

【國譯】

 

의관(議官) 안종덕(安鍾悳)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임진년(1592)의 충신인 고(故) 진주 목사(晉州牧使) 서예원(徐禮元)은 올곧은 충성과 큰 지조로 온 가문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당시의 사적에 대하여 후세의 선비들이 그처럼 두드러지게 적어 놓았건만, 단지 후손들이 영락되고 세대(世代)가 점점 멀어진 결과 임금에게 말씀드리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보고만 되었더라면 표창하는 은전이 어찌 혹시라도 그 때 난리 통에 한 목숨을 바친 여러 신하들의 뒤에 놓이겠습니까?
삼가 상고하건대, 선무 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 증 병조 참의(贈兵曹參議) 서예원이천(利川) 사람으로서 선조(宣祖) 때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고 곽산 군수(郭山郡守)로 임명되었습니다. 호란(胡亂)을 당하자 종군하여 많은 싸움에서 승리하는 공로를 세웠으므로 선조는 가상히 여겨 그의 화상(畵像)을 그리도록 명하여 그것을 보고는 김해 부사(金海府使)로 임명하였습니다. 그 때 임진란(壬辰亂)을 당하였는데 도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모아서 적들을 맞받아 많은 적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그의 공로를 보고하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때 적들이 장차 곧바로 진주(晉州)로 향하려 하자 서예원은 급히 성으로 돌아가 적들과 여러 번 싸웠는데, 27일이 되어 외부의 지원이 끊어져 말먹이와 군량이 모두 떨어지는 통에 군사들과 말이 굶주려서 싸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예원은 여전히 기운을 가다듬고 싸움을 지휘하여 동쪽 성문을 지켰습니다. 충청 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과 의병장(義兵將) 장윤(張潤)이 탄환에 맞아 죽고 적들이 성으로 달려들어 성이 그만 함락되자 서예원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고 남쪽 문에 가서 앉았습니다. 적들이 항복시키려고 하니 서예원은 꾸짖으면서 항복하지 않았으며, 적들이 칼로 찌르는 바람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맏아들 서계성(徐繼聖)은 두 명의 남자 종 금이(金伊), 춘년(春年) 그리고 관아의 종 5명과 함께 곧장 앞으로 내달려 치면서 싸워 적 수십 놈을 죽이고, 모두 적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처 이씨(李氏), 맏며느리 노씨(盧氏), 시집가지 않은 딸 그리고 여종 몇 사람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몸을 묶은 다음 앞을 다투어 강에 뛰어들었습니다. 같은 날 한 성에서 죽은 장수들과 군사들이 6만여 명이나 되었으니, 아! 비통한 일입니다.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된 사실을 명(明) 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보고하였는데 거기에 대략 이르기를, ‘목사(牧使) 서예원은 8일 동안 피 흘리며 싸우다가 외부의 지원이 끊어졌으나 모든 사람들이 적의 칼날을 피하지 않았으며 구차스럽게 살아보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군사를 거느린 장관(將官)이 수 십리 밖에 안 되는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지체하고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동남쪽 변경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원임 좌의정(原任左議政) 정철(鄭澈)은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명나라 사신에게 올린 보고에서, 힘껏 싸워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사람 중에서 지조와 의리가 뛰어난 사람들을 들었는데, 서예원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의 아래, 김시민(金時敏), 송상현(宋象賢), 유극량(劉克良)의 위에 놓으면서 말하기를, ‘적의 칼날에 몸이 가루가 되어도 구차스럽게 살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서예원의 충성과 절개가 당시 의리를 제창한 여러 신하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여기에서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훗날 공로를 평가할 때 유독 원종 2등 공신(原從二等功臣)에 넣었고 벼슬을 추증한 것은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그쳤으니 그것은 당시 공로에 대한 조사가 대체로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지원하지 않은 자들의 손에 의해 진행되었고, 유성룡이 자기 죄를 규탄한 데 대한 분풀이를 서예원에게 하여 그 사실을 덮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 원통합니다.
그 후 여러 신하들은 차례차례 추증하고 시호(諡號)를 주며 부조(不祧)의 은전을 받았지만 유독 같은 날에 나라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서예원에게만은 미치지 않았으니 더욱이 억울한 일입니다. 어찌 오래된 일이라고 해서 표창하지 않겠습니까? 황상께서는 속히 고 충신 서예원에게 높은 벼슬을 추증하고 훌륭한 시호를 주는 동시에 진주충렬사(忠烈祠)에서 추향(追享)하도록 하여 같은 때에 목숨 바쳐 절개를 지킨 충신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경건히 봉안하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억울하게 되었던 충성스러운 넋을 위로하고 한 시대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원본】 45책 41권 47장 A면
【영인본】 3책 219면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군사-전쟁(戰爭) / *인사-임면(任免)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가족-성명(姓名)

 

 

【원문】

 

議官安鍾悳疏略:
壬辰忠臣故晉州牧使徐禮元, 貞忠大節, 闔門殉國。 當時之實蹟, 後賢之敍述, 若彼其表著, 而特以後承淪落, 世代浸遠, 不得上達於天聰矣。 如其有聞裒奬之典, 寧或出於當日殉難之諸臣後哉? 謹按宣武原從功臣贈兵曹參議徐禮元, 利川人也。 登宣廟朝武科, 拜郭山郡守, 値胡亂, 奮身從軍, 多戰捷功, 宣祖嘉之, 命畵像看之, 除金海府使。 時値壬辰亂, 聞都城失守, 收兵赴敵, 斬獲過當。 招諭使臣金誠一, 以功上啓, 差晉州牧使。 敵將直向晉州, 禮元星火馳還到城, 與敵屢戰, 以至二十七日, 外媛不至, 芻糧竝盡, 士馬饑乏, 不能戰, 禮元猶勵氣督戰, 守東門。 忠淸兵使黃進及義兵將張潤, 中丸而死, 敵攔入, 城遂陷, 禮元北向四拜, 歸坐南門。 敵欲降之, 禮元罵不屈。 敵蕞刃剌之, 遂死之。 長子繼聖與二奴金伊春年及官僮五人, 直前格鬪, 殺賊數十, 而竝死於敵刃。 妻李氏、冡婦、未䈂女及婢子數人, 皆蒙頭束身, 爭先投江。 一城將士, 同日死者, 六萬餘人, 嗚呼悲哉! 體察使臣柳成龍陳, 晉州陷城狀, 呈文于明將李如松, 略曰: “牧使徐禮元, 血戰八日, 外援不至, 人皆冒刃, 一無偸生。 領兵將官, 近在數十里外, 逗留不救, 使東南藩蔽, 一朝灰燼, 其罪可勝言哉?” 原任左議政臣鄭澈率百官, 呈文明使, 力擧力戰殉國節義表著者, 而置禮元高敬命·趙憲之下、金時敏·宋象賢·劉克良之上曰: “糜身鋒刃, 不思偸生。” 禮元之忠節, 不下於當時倡義諸臣者, 於此可以信矣。 而後當議功, 獨置於原從二等功臣, 贈止兵曹參議, 蓋其時査勳, 多出於領兵不救者之手, 而以柳成龍之論其罪, 移怒於禮元而掩其實也。 嗚呼冤哉! 其後諸臣, 次第承贈諡與不祧之典, 而獨不及於同日死國事之禮元, 尤爲抑鬱者也。 豈可以事屬久遠而不爲之襃寵哉? 伏願皇上亟將故忠臣徐禮元, 加贈崇秩, 賜以美諡, 仍命追享於晉州忠烈祠, 與同時殉節忠臣金千鎰黃進崔慶會, 一體虔奉, 以慰久屈之忠魄, 以新一世之耳目焉。
批曰: “疏辭, 令政府稟處。”
【원본】 45책 41권 47장 A면
【영인본】 3책 219면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군사-전쟁(戰爭) / *인사-임면(任免)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가족-성명(姓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