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영남의 광주 안씨 관련 학통 정리

쉬어가는 여유 2013. 10. 25. 14:16

 

고려말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이후 근대까지 학통이 전수되는 과정을 정리해 보겠다. 우선 안향 (安珦, 1243 ~ 1306)부터 고려말까지의 과정은

    고려말 성리학의 전래 – 안향 백이정 권부 이제현 주도

에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면 된다. 포은과 목은 이후의 전수 과정을 주로 정리해 보겠다.

흔히들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金宏弼, 1454-1504)  

과 같이 계승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한 말은 아니다. 야은 길재는 정몽주의 문인으로 보기는 어렵고, 양촌 권근의 문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 

와 같은 학통에 속한다. 다만 정몽주의 학통은 위와는 달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 조용(趙庸, ?∼1424) --> 별동(別洞) 윤상(尹祥, 1373∼1455) -->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

와 같은 계통으로 김숙자에게 전해지는 것은 맞다. 김숙자는 또한 야은 길재의 문인이기도 하므로, 목은과 포은의 학통을 모두 계승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만 목은은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 많은 불교 관련 글들을 남기기도 한 반면에, 포은은 배불적 면모가 상당히 강했으므로 조선조 사림들은 목은보다 포은을 훨씬 더 유학의 이상에 맞는 인물로 여긴 탓에 위와 같은 부정확한 계보가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중기 이후의 선비들은 고려조에 충절을 지킨 사람들을 유학의 충을 실현한 것으로 본 탓인지 조선 개국 공신들보다 더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포은이 고려조에 대한 지조를 지켜 순절한 것도 더 추앙받게 된 이유인 듯하다.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도 조선 개국공신보다 고려 충신들을 더 높이 평가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은 많은 문인들을 두었는데, 대다수가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1498년)와 갑자사화(1504)에 희생된다. 갑자사화에 화를 당한 김굉필도 다수의 문인을 두었는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에 희생되고, 다른 제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의 문하에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같은 인물이 나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일정한 스승은 없이 당대의 여러 인물들과 종유하며 영향을 받았는데, 정암 조광조를 존경하여 그의 비문을 짓기도 하고, 김안국을 만나 감화를 받기도 했으며, 그 문인 김인후와는 절친한 사이였다. 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영향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퇴계와 같은 시대의 거유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도 일정한 스승은 없고, 당대 여러 사람과 종유하며 영향을 받았다. 퇴계와 남명 학통의 사람들은 대개 영남 지역에 거주하여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이 벌어지면서 남인 계열에 속하게 된다. 한편 서인 학통의 태두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등은 퇴계와 학설을 달리 하지만 퇴계를 방문하기도 하고, 영향도 받았다. 우계 성혼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문인 백인걸(白仁傑,1497∼1579)의 제자이다.

광주안씨 문중으로는 주부공파나 서령공파의 다수는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이나 우암 송시열 학통의 사람들과 종유하여 서인 계열에 속했는데, 풍애 안민학공은 율곡이나 우계와 가까이 지냈다. 감찰공파나 영남 거주 여러 분파들은 대개 퇴계 학통의 남인 계열(영남학파)에 속했다.

퇴계의 학통은 여러 갈래로 전수되는데, 그 중 광주안씨와 가장 관련이 깊은 성호-순암 학통은 다음과 같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 성호(星湖) 이익 (李瀷, 1681∼1763) --> 순암(順菴) 안정복 (安鼎福, 1712∼1791) --> 하려(下廬) 황덕길 (黃德吉, 1750∼1827) --> 성재(性齋) 허전 (許傳, 1797∼1886)

한강 정구는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이며,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성호는 미수 허목의 학문을 계승했다고 하나 직접 그에게 수학한 것은 아니다. 그의 부친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이 허목과 가까운 사이였고, 성호는 그의 중형 이잠(李潛)에게 수학했다. 성호나 순암은 남인 계열이면서 영남이 아닌 서울 근처에 거주 하여 근기(近畿)학파로도 불리며, 서인 계열인 기호(畿湖)학파와 구분된다.
성재 허전은 많은 문인을 두었는데,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1855-1931) 후산(后山) 허유(許愈, 1833-1904) 등이 있다.

방산 허훈의 제자로는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 서예가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 등이 있고, 수당 이남규의 문인으로는 역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가 있다. 위암 장지연은 여헌(旅軒) 장현광의 12대손이다.
[참고 : 석재 서병오선생의 예술세계 / 김정희 그리고 그의 제자 이하응, 서병오의 글씨]

소눌 노상직은 김해 출신이나 밀양 단장면에서 거주하며 강학하였는데, 밀양의 광주 안씨 관련 글들이 그의 문집 소눌선생문집(小訥先生文集)에 다수 수록되어 있다. [소눌선생문집은 경상대학교 문천각 에 원문 텍스트가 전산화 되어 올라 있다.]

성재 허전의 문인으로는 광주안씨의 경우도

지오(芝塢) 안황원(安璜遠) : (완귀공파) 

석하(石荷) 안종덕 (安鍾悳, 1841~1907) (사맹공파)-나의 高祖父
시헌(時軒) 안희원 (安禧遠, 1846~1919) (위위주부공파) -> 모렴당에서 성호전집 간행
예강(禮岡) 안언호 (安彦浩, 1853~1934) (상호군공파)

등 네 분이 있다. 수당 이남규는 사맹공파 석하공과 친하여 아마 이 때문에 함안의 사간정 비문을 지은 듯 하다.
[수당집 제10권 / 비(碑) / 안씨(安氏)의 사간정(司諫亭) 옛터에 세운 비(碑) /한국고전번역원 고전국역서]

장지연(張志淵)의 대동시선(大東詩選) 권10에는 광주안씨 문중에 전해오는 판전농시사공(判典農寺事公, 휘 器)의 수연에서 함안의 기녀(妓女)가 지어 불렀다는 만수가(萬壽歌)가 작자 "함안기(咸安妓)", 제목 "만수일곡헌안판사기(萬壽一曲獻安判事器)"로 실려 있는데, 위암이 광주안씨들과 친분이 있어 이 시를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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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및 그 선대 학통과 광주안씨들과의 관계는 아래를 참고하라.

점필재 김종직과 광주 안씨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金宏弼, 1454-1504)의 문인 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 1474∼?)은 동문 수학한  모재(慕齋) 김안국(金安1478∼1543)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조광조가 죽게되는 1519년 기묘사화 때 관직에서 물러나 김안국과 함께 여주에서 은거하다, 나중에 창녕으로 내려와 살았다. (기묘사화에 죽지는 않았으므로 인명사전의 몰년 1519는 오류이고, 몰년은 미상임). 이때 완귀공(玩龜公, 휘 증[諱 嶒], 1494 - 1553)이 그 문하에서 배우기도 했다.

불언재공(不言齋公, 휘 영[諱 嶸], 1491 - 1536)이나 완귀공(玩龜公, 휘 증[諱 嶒], 1494 - 1553)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과 종유하여, 남명이 지은 시가 전한다.

사맹공파 옥천(玉川, 안여경 安餘慶, 1538∼1592)공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와 친구 사이이고, 불언재공파 오휴자(五休子, 안신 安, 1569∼1648)공과 사맹공파 옥천공 아래로 출계한 동생 낙원(樂園, 안숙 安璹, 1572∼1624)공은 한강의 문인이다. 오휴자공은 한강의 조카 사위이자 문인이기도 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사맹공파 냉와공(안경점 安景漸, 사맹공파)은 성호 이익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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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또 다른 제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문인 계통도 영남의 광주안씨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아래와 같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 -->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 -->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 --> 밀암(密庵) 이재(李栽, 1657∼1730) -->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 ...

이 계통은 친족간에 학통이 전수되는 경향이 강한데, 석계 이시명은 장흥효의 사위이고, 갈암 이현일은 이시명의 아들, 밀암 이재는 갈암의 아들이며, 대산 이상정은 밀암의 외손자이다.

이 학통의 사람들도 영남의 광주안씨들과 교유가 많았다. 송와공(松窩公, 안명하 安命夏, 1682∼1752, 위위주부공파)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 및 그 문인 정만양(鄭萬陽, 1664∼1730)과 친분이 있었고, 완귀공파 만회공(晩悔公, 안경시 安景時, 1712∼179)은  정만양(鄭萬陽, 1664∼1730)의 제자이다.

이현일의 葛庵先生文集에 송와공에게 주는 시와 편지 1통이 실려 있다.
贈別安國華 命夏 (卷之一 詩 ,127_386c) / 答安國華 命夏 (卷之十六 書, 128_131b)

대산 이상정과 동생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1714∼1789)도 만회공(안경시, 완귀공파), 신암공(안경열 安景說, 완귀공파), 냉와공(안경점 安景漸, 사맹공파) 등 광주안씨들과 교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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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후의 여러 학통
1, 2, 3 (학봉, 서애, 한강)은 퇴계 제자이다.

(1) 학봉학단
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대산 이상정-손재 남한조-정재 유치명-서산 김흥락-성재 권상익-춘번 권명섭

(2)서애학단
서애 유성룡 - 우복 정경세 - 백졸암 유직 - 활재 이 구 - 식산 이만부 - 청대 권상일

(3)한강학단
한강 정구 - 미수 허목 - 반계 유형원 - 성호 이익 - 순암 안정복 - 하려 황덕길 - 성재 허전 - 방산 허 훈 -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

(4) 율곡학단
율곡 이 이 - 사계 김장생 - 신독재 김 집 - 우암 송시열 - 수암 권상하 - 남당 한원진- 운평 송능상 - 성담 송환기 - 강재 송치규 - 수종재 송달수 - 심석 송병선 - 회재 주면겸

(5)우계학단 (조정암 연원)
우계 성 혼 - 팔송 윤 황 - 미촌 윤선거 - 명재 윤 증 - 일암 윤동원 - 도계 이양원 - 해은 강필효 - 과재 성근묵

(6) 고봉학단
고봉 기대승 - 제봉 고경명 - 육류정 박지호 - 하담 박태현 - 주곡 박치화 - 호계 김광수

(7) 월천학단
월천 조 목 - 만퇴헌 김중청 - 이시겸 - 이 락 - 이인유 - 이 익 - 이문현 - 이규진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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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조용(趙庸, ?∼1424)
별동(別洞) 윤상(尹祥, 1373∼1455)
강호산인(江湖散人) 김숙자(金叔滋, 1389∼1456)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金宏弼, 1454-1504)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성호(星湖) 이익 (李瀷, 1681∼1763)

순암(順菴) 안정복 (安鼎福, 1712∼1791)
하려(下廬) 황덕길 (黃德吉, 1750∼1827)



성재(性齋) 허전 (許傳, 1797∼1886)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 1855∼1907)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
석재 서병오선생의 예술세계
김정희 그리고 그의 제자 이하응, 서병오의 글씨


230.소눌 노상직(상) / 231.소눌 노상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