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그리운 얼굴)

廣州安氏族譜後序(己未譜)

쉬어가는 여유 2013. 8. 24. 13:29

 

吁譜豈易言哉大凡人家有族必有譜非輯譜何以奠繫世非聯宗何以辨昭穆是

宜上而統乎始下而達于疏千派萬技氣泳相因遠族近屬班行自別一開券之間

而心目瞭然親之長之彼此無礙翕如雍如情誼益敦若是乎譜之於人也基關且

重乎吾門素稱篤族世譜常厥頃年兩棄翁父子洊發此議而有志未就丙辰秋山

南宗黨同聲倡勵叶謀鑱板分定諸任徧通于圻湖僉宗則安建中極自京下鄕與

義亨命聃諸君欄熳商確指日可待顧基見事有同異責效有緩急中間徒勞往復

辭說自詒噬臍之悔而致令經紀重擧空費了許多時日豈勝悚愓于心乎今者命

聃之弟命揆與義亨之弟信亨及族侄仁宅壽仁爲是之慨更鳩貲力勇意直前可

謂乃兄弟矣其亦賢勞矣乎顧不侫亦同事旣熟謬囑以續貂辭不擭逎敢依樣

爲之記曰嘻噫我廣陵家世顯揚兩朝聲猷燀爀竊想先長德宿儒已留意擧拳拳

於此而第因循未諧以待夫今日而後成或者祖宗지靈以遺憾於平日者而嘿誘

我孱孫不肖假手以克述者耶盖建中跋涉千里遹遵先大人遺旨詢謀與同且移

譜南韓更加勘正謂之母忝貽謀可乎若汝仁甫以   判事公宗孫揔管宗事而不

幸早世至於線寫則학(金+學)與命粹緫裁編摩則義亨甫終始而命夏亦有聞焉鳴呼自

吾譜之成爲   廣陵君後孫者果能以吾先祖之心爲心而視吾先祖雲仍諸族一

體均愛無親踈遠近之間彼此厚薄之別且樂且湛迺扶迺恤克盡報本之道永修

敦睦之誼則漢山八百年家聲之不墜庶因此爲之兆而蘇明允所謂孝悌之心油

然而生者抑不多讓也.

 

          屠維大荒落大族下澣  後孫明夏 盥手謹序

 

 

 

 

 

 

 

 

광주안씨 족보 후서(廣州安氏族譜後序)

 

※己未年(一六七九)에 족보를 발간 하려고 하였으나 十年뒤에 성사함.

아!족보의 편찬이 어찌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사람이 살아 가는데는 동일혈족(同一血族)의 친족이 있게되고 그리하여 반드시 족보(族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족보가 없으면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세계를 어찌 정할 수가 있으며, 동성동본(同姓同本)의 일족을 함께 모아 연결하여 모으지 않으면 어떻게 세대(世代)의 차례를 구별 할 수 있겠느냐? 이러하므로 위로는 시조(始祖)의 혈통(血統)을 이어 받아서 아래로는 먼 친족에 이르기까지 계파(系派)가 천 갈래 만 가지(枝)로 갈라지더라도 우리들의 심신을 이루는 근본혈통(根本血統)은 서로가 공통적으로 함께 이어받고 있으므로 멀고 가까운 일족(一族)들의 대수(代數)와 항렬(行列)이 저절로 구별되어 어느 때라도 족보를 한 번 펴보면 一家 사이의 멀고 가까움과 연령(年齡) 나이의 많고 적은 정도를 확실하게 알 수가 있어서 서로가 아무 거리낌 없이 화합하게 되고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하고 따뜻한 情이 더욱 돈독(敦篤)해지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이 우리들의 생활에 있어 족보는 重大한 관계가 있다고 아니할 수 있겠느냐?

우리 가문(家門)은 세상에서 말하기를 인정이 두텁고 신실한 宗族이라고 하지마는 대대(代代)로 이어져 나려오는 계통을 정리(整理)하여 모은 족보가 아직도 없었는데 몇 해 전에 양기재(兩棄齋:二十九世, 諱는 瑞羽,思簡公 후 감찰공파, 증직 참의, 一六六四~一七三五)노장(老長)의 부자가 족보의 편찬을 거듭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병진년 가을에는 영남(嶺南: 경상도)의 종친들이 한 마음이 되어 서로 호응(呼應)하듯 족보출판을 의논하여 결정하고 그 일을 맡을 임원을 정하여 경기 호남 지방의 여러 종친에게 통보하였더니 경기지방에 살고 있는 양기재(兩棄齋)의 아들인 극(極:三十世 字 는 건중(建中), 順菴의 父,증직 호조참판,一六九六~一七五四) 이 이곳으로 와서 의형(義亨:三十一世, 字는 인수(仁叟), 중랑장공후 사맹공파, 수직(壽職), 동지중추부사,一六八三~一七七三)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진정으로 가슴을 열고 모든 문제를 서로 비교하고 충분히 의논하여 결정할 수 있게 되어 멀지 않은 장래에 족보편찬을 기대(期待)하였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떤 사실을 바라보는데 동일하지 않는 데가 있고 해야 할 임무를 실행하는 데에 절박한 정도의 차이가 있어 그 중간에 아무 보람도 없는 의론만 오고 가다가 아무리 반성하여도 어쩔 수 없는 후회만 남기게 되고, 우리 종중의 기본 법도가 될 중대 사업을 추진하는데 허다한 세월만 쓸데없이 보내게 되었으니 어찌 마음속으로 황송(惶悚)하고 미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때에 명담(命聃)의 아우 명규(命揆)와 의형(義亨)의 아우 신형(信亨), 그리고 족질(族姪) 仁宅 壽仁 등 여러분이 사업의 추진되지 못함을 한탄(恨歎)하여 다시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용기있게 진행하게 되었으니 그 훌륭한 형에 그 아우라고 아니할 수 있겠으며, 그 또한 재능이 남보다 뛰어나 공사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못난 이 사람 또한 이 사업을 함께 추진한기가 오래 되었는데 변변치 못한 이 사람을 잘못 평가하여 序文을 쓰도록 부탁하기에 사양하였으나 용납되지 않아 이에 감히 정해진 양식에 의거하여 기록하는 바다.

아! 기뻐서 감탄할만한 일이로구나! 우리 광릉(廣陵: 지금의 광주) 家門은 高麗, 朝鮮 두 王朝에서 대대로 명성을 높이 드날려서 찬란(燦爛)히 빛났으나 마음속으로 생각해보니 先代의 덕망과 학식이 높은 어른들과 학자들이 이미 이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바쳐 힘썼으나 다만 각자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서 화합을 이룩하지 못하고 지내오다가 오늘을 기다린 후에야 성사가 되었으니, 아마도 始祖를 비롯한 先代 祖上들의 영혼께서 평소에 늘 유감으로 생각하시다가 아무런 말씀도 없이 잠잠한 가운데 아득하고 그윽한 저승에서 저희들 용렬(庸劣)한 後孫들을 引導하시어 이 사업을 이루어내도록 하신 것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건중 (建中:三十世 諱는 極,)은 千里의 멀고 험한 길을 왕복하는 괴로움을 무릅쓰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남기신 뜻을 잘 받들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상의하여 합의를 이루었으며 또한 족보의 草案을 남쪽지방의 一族에게도 보내어 잘못을 한번 더 바로잡도록 하였으니 子孫을 위하여 남겨주신 先代의 計策을 충실히 실행하여 욕됨이 조금도 되지 않도록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汝仁과 같은 사람은 판사공(判事公) 주손(胄孫)으로써 이번 족보편찬(族譜編纂)의 事務를 모두 맡아 관리 하다가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초안을 정리하여 정서(淨書)하는 일은 학(학:中郞將公候 司猛公派), 명수(命粹:三十世 字는 윤중,衛尉主簿公派) 서예가 뛰어남,一七ㅇ三~一七六四) 가 맡았으며, 편찬에 관한 모든 일을 총괄(總括)하여 결정하는 일은 義亨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맡고 저 명하(命夏:三十世 號는 송와(松窩), 위위 주부공파, 學德이 높아 광천서원에 봉향,一六八二~一七五二) 또한 이 일을 맡아 수행하게 되었다.

아! 우리 족보편찬 사업이 완성된 지금으로부터 장래에는 廣陵君(廣州) 後孫이 되는 모든 사람들은 과연 우리 先祖의 마음을 잘 살펴서 나의 마음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先祖께서 아득하게 먼 後孫들일지라도 모든 후손들을 하나같이 골고루 사랑하시듯이 우리 親族들 간에도 친밀(親密)과 소원(疎遠), 그리고 멀고 가까운 區別에 따른 피차간(彼此間)의 인정이 두터워지고 얇아지는 일이 없이 모두가 일족으로써 좋아하고 화락하며 서로 도우고 특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一族을 돌보아서 내가 태어난 根本을 잊지 않고 조상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도록 모든 힘을 다할 것이며, 친족간의 화목을 다하도록 영원히 힘쓴다면 우리 廣州安氏 八百年의 명성이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게 되고, 족보편찬사업으로 인하여 더욱 왕성(旺盛)하게 된다면 소 명윤(이름은 순(洵),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소 동파(東坡)의 父家) 이 말한 바와 같이 효성(孝誠)과 우애(友愛)의 마음이 하늘에 구름이 피어나듯 저절로 가슴 벅차게 일어남을 또한 억제(抑制)할 수 없으리라!

 

      

            己未(一六八九) 正月 下旬

                                          후손 명하 손을 씻고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