詠歸 --柳成龍--
집으로 돌아감을 노래하다
五陰生碧樹(오음생벽수)
한낮의 푸른나무 아래는 그늘이 졌는데
春旭澹淸沂(춘욱담청기)
봄날 햇살은 맑은 물결따라 일렁이네
盥濯眞源潔(관탁진원결)
목욕을 하고 나니 세속에 오염된 본성이 청결해지고
乘凉逸興飛(승량일흥비)
서늘한 바람쐬니 고상한 흥취 일어 날아 갈듯하네
相隨和且樂(상수화차락)
벗들과 동반하니 화목하고 즐거워서
自適詠而歸(자적영이귀)
유유자적하게 시가를 읊다 집으로 돌아가네
上下元同貫(상하원동관)
하늘과 땅은 원래 근원이 동일하거늘
天人豈異畿(천인기이기)
하늘과 사람이라고 어찌 그 경계를 달리하겠는가?
聖文宜見許(성문의견허)
공문의 도 전할 사람은 응당 존중 돼야 할것이나
諸子誰能幾(제자수능기)
문도들중 누가 능히 그걸 달성하랴?
正學今無繼(정학금무계)
공문의 바른 학문 지금 이어지지 않는데
高山仰自巍(고산앙자외)
산높다고 쳐다만 보면 당연히 높고 험준하지
※生碧樹:푸른 나무아래 그늘이 지다. ※春旭:봄날 햇살
※澹淸沂:기수 물결 따라 일렁인다
※盥濯:목욕하다.말끔히 씻다
※乘凉:서늘한 바람을 쐬다 ※逸興飛:고상하고 호방한 흥취가 일어
하늘을 날아 갈듯 하다
※相隨:동반하다.뒤따르다
※和且樂:화목하고 안락하다.
※詠而歸:시가를 읊다 집으로 돌아가다
※元同貫:본래 하나의 근원이다.
※豈異畿:어찌 경계가 다르겠는가?
※宜見許:다같이 칭찬 받아야 한다
※誰能幾누가 능히 달성하겠는가?
※今無繼:지금은 계승되는 것이 없다.
※仰自巍:쳐다만 보면 당연히 높고 험준하게 느껴진다.
■柳成龍(1542~1607)
유성룡[柳成龍, 1542(중종 37)~1607(선조 40)]은 朝鮮 中期의 文臣·學者이다. 字는 이현(而見)이고, 號는 서애(西厓)이다. 本貫은 豊山으로, 5代祖 유홍은 金宗直의 고모부이고, 曾祖父는 김계행의 사위이다. 父親과 再從叔을 통해 가학을 배우다가 21세에 李滉을 찾아가 수 개월 동안 『근사록』을 修學하였다. 1564년(명종 19) 司馬試를 거쳐 1566년 別試文科에 丙科로 及第하여 承文院 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藝文館檢閱과 春秋館記事官을 兼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書狀官으로 明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修撰에 제수되어 賜暇讀書하였다.
이후 狡吏·응교 등을 거쳐, 1575년 直提學, 다음해 副提學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鄕里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大司諫·都承旨·大司憲을 거쳐, 慶尙道 觀察使로 나갔다. 1584년 禮曹判書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兼職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경상·전라 삼도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하였고,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제조와 성곽수축 등 군비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사후 안동의 병산서원, 여강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유성룡은 학문적 업적보다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수습한 경세유로서의 업적이 보다 주목되는 인물이다. 『징비록』(懲毖錄)·『상례고징』(喪禮考證)·『신종록』(愼終錄)·『영모록』(永慕錄)·『난후잡록』(亂後雜錄) 등 그의 저술에도 경세에 관한 내용이 절대적이어서 성리학자로서의 특징을 읽을 수 있는 글은 적은 편이다. 그러나 이황의 고제(高弟)로서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영남학파의 발전에 한 축을 이루는 사상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유성룡은 이황의 문도로서 스승이 확립한 성리학의 기본 관점을 그대로 계승하지만, 사단칠정과 같은 성리설의 문제에 관한 특별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학문과 관련하여 특기할 점은 육왕학(陸王學)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이다. 17세에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 갔다가 『양명집』을 구해 보게 되었는데, 이때의 일이 인연이 되어 유성룡은 평생 양명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상산학과 양명학에 대한 그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이황의 양명학 비판의 연장선에 있지만, 양명학의 근본정신에 대해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양명학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마음의 수양을 특히 강조하는 그의 학문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리선기후(理先氣後) 및 호발설(互發說)을 확고히 지지한다는 점에서 이황의 성리설을 계승하고 있지만, 원대 허형(許衡)의 출처관에 대한 평가나『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해석에서는 독자적인 견해를 보인다. 문인으로는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김응조(金應祖) 등이 유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성룡 (조선 전기 수양론, 2004., 정원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