菊 =金堉.=
국화
繞舍循除皆種菊(요사순제개종국)
집 주위 빙 둘러 온통 국화를 심었더니,
開窓隨處可看花(개창수처가간화)
창문 여니 곳곳에서 국화꽃만 볼 수 있네.
翻嫌堆岸黃金色(번혐퇴안황금색)
흉하던 언덕이 황금색으로 에워 쌓았으니,
却似貪錢富貴家(각사탐전부귀가)
남들은 도리어 금화를 탐한 부잣집이라 하려나.
※繞舍(요사): 집을 두르다.
※循除(순제): 차근차근 둘러보다
※翻嫌(번혐): 미워하다, 흉하다.
※堆岸(퇴안): 언덕에 쌓다.
※却似(각사): 꼭 닮다.
※貪錢(탐 전): 돈을 탐하다.
■金堉 (1580~1658)
朝鮮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字는 백후(伯厚), 號는 잠곡(潛谷) · 회정당(晦靜堂), 본관은 청풍이다. 조부는 김비(金棐), 부친은 김흥우(金興宇)이고, 외조부는 조희맹(趙希孟)이다. 아들은 金佐明, 손자는金錫胄이다.
1605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른바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하였다. 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하는 것에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쫓겨났다. 이후 자신의 근거지인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潛谷里)에 은둔하여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되었고, 1624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인조 재위 초반에 음성현감 · 전적 · 병조좌랑 · 지평 · 정언 ·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 청(淸)나라가 군사적으로 압박해오자 호패법을 중지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하고, 체찰사 김류(金瑬)를 수행하여 남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1632년 인목대비가 죽자 장례를 담당하는 산릉도감의 관원이 되었고, 1636년 성절사(聖節使)로서 명(明)나라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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