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平調詞 --李白--
雲想衣裳花想容(운상의상화상용)
구름은 그대의 옷인 듯, 꽃은 그대의 얼굴인 듯한데
春風拂檻露華濃(춘풍불함노화농)
봄바람 난간을 스치는데 이슬 맺힌 꽃은 영롱하구나.
若非郡玉山頭見(약비군옥산두견)
만약 군옥산 위에서 만나지 못햇더라면
會向瑤臺月下逢(회향요대월하봉)
아마도 요대의 달빛 아래서 만났으리라.
※檻:난간 또는 격자가 잇는 창문 난간.우리.함정
※拂:떨치다.사악함을 털다.먼지를 털다.
※濃:짙다.진하고 맛이 좋다.깊다.
※:露華:이슬 방울을 꽃에 비유한 말
※若非:만약~~아니면
※瑤臺:옥으로 만든 누대.즉 서왕모를 비롯한 선녀들이 거처했다는 궁전
■李白
字는 태백(太白)이요 號는 청련거사(靑蓮居士)다
중국 당나라시대의 시인 이백(李白)은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다. 두보가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한편 이백은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이 밖에 적선인(謫仙人) 또는 벼슬이름을 따서 이한림(李翰林)이라고도 한다.
701년 중앙아시아에서 한족 출신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이백은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서천(西川)으로 옮겼으나, 25세에 집을 떠나 세상을 홀로 떠다녔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이백은 산중에서 지낸 적이 많았다.
43세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이백의 임무는 포고문 초안을 마렴하거나, 임금의 향연에 불려나가 임금의 치적을 칭송하는 시를 짓는 일이 고작이었다. 어지러운 조정 분위기와 일종의 어용 문학인으로서의 처지에 답답함을 느낀 이백은 결국 장안의 한량들과 술을 마시고 노는데 몰두한다.
결국 그는 744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하기도 했다. 이후 안록산의 난이 시작된 755년까지 산동성의 집을 거점으로 북쪽과 남쪽의 여러 지방을 두루 유람했다.
안록산의 난으로 당 현종이 장안을 버리고 촉으로 피신했고 결국 그의 아들 형이 왕위에 올라 당 숙종이 되었다.
이백도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했다. 그는 756년 안록산 잔당을 토벌하여 기세를 떨치던 영왕 린의 권유에 못이겨 그의 막하에 가담하지만, 그 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던 숙종에 의해 린의 거사가 역모로 간주되었고, 결국 이백 역시 연루되어 옥살이 끝에 귀양을 가다가, 중앙 관직에 남아 있던 술친구, 시친구들의 도움으로 759년에 사면되었다.
그 후 이백은 여기저기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시는 <산중문답(山中問答)> 등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하는데, 주로 낭만적인 성향의 시들이다. 시풍이 호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언어 사용이 명쾌했으며, 그 사상적인 기반은 도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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