刈麥謠(예맥요) --李達--
田家少婦無夜食(전가소부무야식)
시골집 젊은 아낙네 저녁거리 없어
雨中刈麥林中歸(우중예맥임중귀)
비 오는데 보리 베어 숲길로 돌아오네
生薪帶濕烟不起(생신대습연불기)
생나무에 습기 있어 불조차 붙지 않고
入門兒子啼牽衣(입문아자제견의)
문에 들어 선 어린아이 옷자락 당기며 울부짖네
※田家:농부의 집. 시골집
※少婦:젊은 아낙네
※雨中:비가 오는 가운데. 빗속
※刈麥:보리를 베다
※生薪:생나무(생 땔나무)
※帶:띠. 붙어 다니다.
※牽衣:옷을 끌다.
※6~70년대 보릿고개 시절을 생각나게 하네요.
허기진 배를 우물물 한 사발로 채우고 부모님은 당신의 배는 굶어도 자식들의 배만은 굶기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하셨지요.
지금은 모든 것이 풍족하여 음식이 남아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니 새삼 隔世之感(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李達(1539~1612)
朝鮮 중기의 詩人이자 서예가이다. 字는 익지(益之), 號는 손곡(蓀谷) · 서담(西潭) · 동리(東里), 本貫은 신평(新平)이다. 부친은 영종첨사 이수함(李秀咸)이며, 홍주의 관기(官妓)에게서 태어나 서자로 성장하였다.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許筠과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에게 시를 가르쳤다. 허균은 스승인 이달이 훌륭한 재능을 지녔으나 서얼이기 때문에 불우하게 사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제자 허균(許筠)은 이달의 전기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으면서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익지이니, 쌍매당 李詹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원주 손곡에 묻혀 살았기에 호를 손곡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당시 유행에 따라 송시(宋詩)를 배우다가, 鄭士龍으로부터 두보(杜甫)의 시를 배웠다. 朴淳이 그에게 시를 가르치다가 "시도(詩道)는 마땅히 당시(唐詩)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 소식(蘇軾)이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이류로 떨어진 것이다."라고 충고하면서, 이백(李白)의 악부(樂府) · 가(歌) · 음(吟)과 왕유(王維) · 맹호연(孟浩然)의 근체시(近體詩)를 보여주었다. 이달은 시도가 여기에 있음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 당시(唐詩)를 익혔다. 『이태백집』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글, 유우석(劉禹錫)과 위응물(韋應物)의 시, 양백겸(楊伯謙)의 『당음(唐音)』 등을 외웠다. 이렇게 5년 동안 계속 당시를 배운 뒤에는 예전과는 다른 시를 지을 수 있었다.
한편 시풍이 비슷한 최경창(崔慶昌) · 白光勳과 어울려 시사(詩社)를 맺어 문단에서는 이들을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봉은사를 중심으로 하여 여러 지방을 찾아다니며 시를 지었는데,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많이 모였다. 林悌 · 허봉 · 양대박(梁大樸) · 고경명(高敬命) 등과도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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